제1독서(에제 37,12-14) 해설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리리라>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불충실을 단죄했다. 그러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는 전과는 전혀 딴판인 전언을 선포해야 했다. 이민족들을 거슬러서도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의 비웃음과 모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민족들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언했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심판대 앞에 이집트, 암몬, 모압, 에돔,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불러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을 비웃은 죄를 심판하실 것이다(25-32장). 에제키엘은 귀양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에 관한 예언을 한다.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들판에서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말씀을 내리시고, 그 말씀은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어, 새로이 커다란 백성, 고통을 딛고 일어선 강력하고 커다란 ‘군대’를 마련할 것이다.
14절 말씀은 특히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에제키엘은 히브리인들이 지닌 믿음의 근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참된 주인이요 창조주이시다. 사람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짓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짓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생명을 하느님께서 완성으로 이끄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 불신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완성으로 이끌려 하신다. 우리는 그 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편 (129) 해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나이다>
기다림은 믿음에서 우러난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우리의 죄악을 씻어주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준다(시편작가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업적을 예고한다). 기다림은 또한 희망을 동반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제2독서(로마 8,8-11) 해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십니다>
로마 7-8에서 바오로는 자기의 큰 주제를 다시 펼친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로마 1,16-17). 바오로는 율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율법으로 우리 죄가 드러나고, 단순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7,24)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주십니다”(10-11절).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죄악의 생활을 청산하고(묻어버리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정신과 마음으로 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 새로운 사람인 우리는 죽을지라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게 이미 부활해 있는 것이다.
복음(요한 11,1-45, 또는 요한 11,3-7.17.20-27.33Sㄴ-45) 해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장은 복음 전체를 집약하는 사건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 사건이다.
4절: 이 구절에서 말하는 병은 일반적인 병이 아니다. 이 ‘병’은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병을 이용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2,11). 즉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9-10절: 마지막 ‘시간’은 ‘예수님의 시간’이요, 당신이 참으로 ‘세상의 빛’이심을 믿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실 마지막 파스카(죽음에서 부활한 생명으로 건너감)의 ‘시간’이다(참조. 1,4; 3,19; 8,12).
16절: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어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맛볼 것이며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스런 부활을 맛볼 것이다.
17절 이하: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리라고 단언하신다. 마리아가 그 말씀을 굳게 믿는다(23-2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고 확언하신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이시다(11,4).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사람들이 살아난다. 십자가는 생명의 샘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쏟아 부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고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필요가 있었다(7,39). 라자로도 이 성령의 힘을 미리 받아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도 우리의 시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과정(파스카)을 거쳐야 한다.
묵상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이다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원하신 뜻과 그분의 구원계획은 죄를 지어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당신의 생명을 되돌려주기 위하여 점진적이고 인내로운 작업과 활동을 전개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새로운 창조 작업에 사람 편에서도 자유로운 선택으로 굳건히 협력해야 한다. 이번 주일의 독서들은 그 하느님의 계획이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감을 깨닫게 해준다. 새로운 영이신 성령을 보내어 사람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겠다는 약속에서 출발하여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에까지 다다른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신비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을 새로운 생명과 생활의 원리(원천)로 받게 된다. 성령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영적 사람’(새사람: 성령의 사랑을 생활의 원리로 삼는 사람)답게 처신하고, ‘육체적 사람’(옛 사람: 분열과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의 습관을 버리도록 촉구 받는다.
악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다
사람은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늘 체험하는 죽음으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바가 아니다. 죽음은 악마의 시기로 이 세상에 들어왔고(지혜 2,24.1,13; 창세 3,3.19; 로마 5,12),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다(로마 1,32). 사람은 본래 자기 창조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창조되고 초대 받았다. 하느님의 모습 따라 창조된 사람은 없어지도록(無化) 운명 지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주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위하여 존재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육적인 사람’을 선택함으로 인하여 죽음을 자초하였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로마 8,13). 이와 같이 죄를 범하면 죽음이 사람을 지배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는 똑같은 사람으로서 조건을 몸소 취하셨다. 사람이 되신 말씀 곧 하느님의 아드님은 당신 영광의 신비를 감추신다. 그분은 당신의 지상 생애 동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광을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가장 무력한 사람의 조건을 당신 것으로 삼고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완전히 열린 분이고, 오로지 당신 부활로써만 아버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영광을 차지하려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남으로써 당신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 아드님의 지존하신 조건과 사람의 비천한 조건을 결합시키셨다(참조. 필리 2,6-7). 그분은 사람이 죄를 범한 결과를 당신이 몸소 견디실 뿐 아니라, 사람이 되어 계신다는 그 자체가 그분을 외부적으로 죄인들 중의 하나로 위치시켰다(참조. 로마 8,3; 2코린 5,21). 그분은 떨리는 마음으로 또 간절히 견디기 어려운 당신의 힘겨운 조건을 빠져나가는 해방의 시간을 고대하고 계셨다.
해방을 향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죽지 않으신다. 죽음이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한다(로마 6,9). 죄악의 육체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그분의 피로써 구세주의 인간성은 새로이 다시 태어나고, 육적 사람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인 당신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고, 영광을 입고, 그 영광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신다(참조. 1코린 15,45). 그분의 새로운 존재는 성령으로 속속들이 배여 있고, 성령께로부터 고유한 역동성과 능력과 특징을 받는다.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인류가족이 생겨났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인간성은 첫 번째 새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머리이시다. 나자렛 예수님을 부활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인류를 출범시키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서 나온 놀라운 업적이다.
성령을 생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구원의 업적은 새로운 인류를 일으킨다.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고 시공(時空)의 역사 안에 깊이 침투하고 넓게 퍼진다. 그러나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확보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그 업적이 자기 안에 작용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새로운 인류가족의 일원이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먼저 구세주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해야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가 있다. 증오와 분열을 일삼는 옛사람에 죽고, 사랑의 단결을 이룩해가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
끊임없는 투쟁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활태도와 처신으로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미 하느님의 생명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아직 그 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여 내적 사람이 변형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콜로 3,1-17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신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은총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람을 아주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은총을 받아 사랑과 단합을 위해 사는 ‘새사람’이 되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로이 선택하고 결단하는 노력을 전제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신 분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함께 걸어가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가 인생을 모든 사람과 온 인류에게 바쳐야 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사랑하기 시작하고,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사랑의 성령으로 사는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한다.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를 부활이라는 유일한 운명으로 단합하게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용감하게 진군하는 백성이다. 파스카는 성령 안에서 일치하고 단결하는 축제인 것이다.
사순 제5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에제 37,12-14)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리리라>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시편(129)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나이다
제2독서(로마 8,8-11)
<예수님을 되살리신 성령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복음(요한 11,1-45, 또는 요한 11,1-7.17.20-27.33Sㄴ-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