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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한 여자를 구속시키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맘편해하다니…
  • 전순란
  • 등록 2017-04-03 10:26:35
  • 수정 2017-04-03 1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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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1일 금요일, 봄비


아직 잠이 덜 깬 봄 아가들은 봄비가 도닥여서 잠을 깨운다. 겨울 내내 한두 번 마당에 보일 듯 말듯 눈이 내렸고 오후가 되기도 전에 자취 없이 사라졌다. 워낙 가물어 나무고 풀이고 꽃이고 몸을 비틀며 시들어가고, 튤립도 꽃대를 쭉 올리지 못하고 옹색하게 꽃자리를 찾고 있다. 물기가 없으면 피어난 꽃도 며칠을 못 넘기고 고개를 묻곤 하는데, 오늘 드디어 봄비가 내렸다. 산수유 꽃잎 그 가녀린 꽃술 끝마다 예쁜 수정방울을 달고 한참을 흔든다.



모든 게 아름답고 평화로워 마음이 한가롭다. 한 여자를 구속시키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맘편해 하다니… 새벽녘 “여보! 구속이야!”하는 보스코의 소리를 듣고 시계를 보니 3시10분! 나도 자정을 넘기고도 거의 매 시간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켜보았는데 보스코 역시 마루 소파에서 선잠을 자며 바끄네의 구속영장 발부를 기다렸나보다. 


정작 본인은 탄핵도 안 믿었고, 헌재의 파면도 걱정 안 했고(헌재 기각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마련했다니까),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도 염려 안 했다니 영장전담판사의 구속영장 발부까지는 상상도 안 했던 것 같다. 서울구치소로 가는 차에서 드디어 실감이 났을까?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를 낸 지 10년 후, 악의 평범성을 논했던 자기 글을 재검토하는 기다란 반성문을 기록한 적 있다. 악인의 행위가 정말 괴물처럼 패악스러운데도 정작 그 행위자는 전혀 괴물 같지 않더라는 관찰이다. 아이히만이 경찰심문에서 보인 언행은 전적으로 어리석음이나 무식이 아니라 ‘사유의 불능’이었다!


박근혜의 구속장면

▲ (사진출처=한겨레)


그들은 그들 나름의 언어규칙을 만들어 놓고서는 유대인 대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 하고, 남녀노소를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 가스실로 몰아넣으면서 면서 ‘이송작업’, ‘재정착’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죄의식일랑 깔끔하게 세탁한다. 박근혜도 세월호 비극을 묵살하고, 문화인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공무원들을 추방하고, 대기업에서 뇌물을 뜯어내면서 ‘통치행위’, ‘비판세력척결’, ‘문화창달’이라는 용어로 헌법정신을 죄다 표백해 버렸다. 국민 앞에서 행하는 회견이나 검찰 조사나 헌재 심판에서도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고 뭐가 죄가 되는지 ‘사유’하는 능력이 아예 태생적으로 결여된 여자였다. 그니가 권좌에서 끌려 내려와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잘못했다고 고백할 때 ‘구원의 여지’가 있는데 자기 언행이 위법하거나 악하다는 사실마저 모른다면, 종교에서는 ‘화인(火印) 맞은 양심’이라 하고 그 자체가 하느님의 가장 두려운 저주로 여겨진다.


요즘 가끔 ‘썰전’을 시청하는데 ‘보수논객 전원책’의 발언을 보면 보수면서도 귀엽기까지 하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기민당의 알력을 다독여주던 콰레스키의 소설 「돈 까밀로」의 주인공인 ‘읍장 뻬뽀네’를 보는 느낌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어 구원의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보스코의 친구 중 한 사람 카친, 페친을 차단했다. “김진태 애국대통령” 운운하는 스팸들이 내 페북을 도배하는데 바로 그 스팸들이 그 친구를 통해서 들어왔음을 발견했다. 우리 부부가 어떤 성향이고 전순란의 일기가 어떤 색채를 띠는지 알면서도 그런 글들을 퍼 올리는 것도 견딜 수 없고,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는 글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아는 어느 인사는 보수 중의 보수이지만 “박근혜의 저런 행동은 보수 전부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어떤 말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보수가 전체국가와 국민에게 죄를 지었다”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오빠야 내 혈육이니 끊을 수 없는 내 업보요, 태극기 집회에 모여드는 늙은이들이야 멀리서 보는 굿판이지만 친구 사이에 오가는 글은 시국관이 너무 다를 적에는 당분간 내 편에서 끊는 게 좋겠다.


오늘 빗속에도 우리 집 ‘T-브로드’ A/S 총각이 와서 와이파이와 TV세트톱박스를 손질해 주고 갔다. 간식을 주면서 내가 물었다. “그대의 가장 큰 소망이 뭐요?” 나이가 서른다섯이라 들은 터여서 “예쁜 색시 만나 장가가는 거예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지금 6년째 비정규직이거든요. 정규직 되는 게 소원이에요”란다. 그 말에 지금도 내 맘이 어찌 이리 아플까?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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