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복음의 핵심!”
[...] “가난”은 항상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그런데, 이 신부는 가난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한단 말이야, 이 주교는 가난에 대해 말하고, 이 그리스도교 신자는, 이 수녀는 가난에 대해 말하네 …, 이 사람들 좀 공산주의자 아니야?”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가난은 바로 복음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가난을 없애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어떤 부유함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에서, 곧 믿음에서, 말씀에서, 지식에서, 모든 열성과 우리가 여러분에게 가르친 애덕에서 부유합니다.
... 아주 큰 이 부유함이 - 열정, 애덕,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께 대한 지식 - 호주머니에 도달하게 하세요. 이건 황금률입니다. 신앙이 호주머니에 도달하지 못하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황금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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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서 부유함이 옵니다. 상호 교환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상으로 우리가 “가난의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토대에 도달합니다. 가난은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서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사실 여러분은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과 말씀과 은총의 선물로 부유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이 낮추어 주심, 이 낮아지심, 이 가난해지심 안에서의 하느님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의 신학의 핵심으로서 또한 첫 번째 참행복에도 나옵니다. “영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부유해지고 그리스도의 부유함이 아닌 다른 부유함으로 부유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나를 부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의 것을 주는 것인데, 남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도 주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나를 부유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나를 부유하게 하나요?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이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한 공동체에, 모든 것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어떤 것을 - 남는 것만이 아니라 - 비울 때마다 이것이 나를 부유하게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내 안에서 예수님이 행동하시고, 내가 이렇게 할 때 나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서 행동하십니다.
이것이 가난의 신학입니다. 왜냐면 가난은 복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신비입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의 신비에요.
그렇게 해서 참행복의 첫 번째가 왜 “영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주님의 이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곧 지금 이 희생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빵”이 되실 만큼 낮아지시기도 하는 주님의 가난입니다. [...]
국방그라시아 수녀 : 성심의딸 수녀회 수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