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
다석 사상의 뛰어남 가운데 하나는 그동안 언문, 암글이라고 무시되고 천시 받아 온 <한글>로서 학문할 수 있고 철학할 수 있음을, 아니 철학해야 함을 보여준 데 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 오고 있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고 믿었으며, 바로 우리말 속에 우리의 독특한 삶의 방식, 사유방식, 철학이 들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석은 우리의 한글이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글이라고 본다.
“우리 한글은 참 이상합니다. 우리말에는 하늘의 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으[ㅡ]’로 세상을 표시하고 하늘 점[·]을 찍고[ㅜ] 신발 짝[ㄴ]을 올려놓으면 ‘누’가 되고, 사람[ㅅ]을 올려놓으면 ‘수’가 되며, 원[ㅇ]이나 무한을 올려놓으면 ‘우’가 됩니다. 곧 ‘누수우’가 됩니다. (…)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이것을 생각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우리 글에는 무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⑴
사람만이 만들어 낸 말과 글은 어느 말이나, 어느 글이나 하느님의 계시로 안 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말이 생긴 것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의 기도에서 얻은 산물이다. 글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글은 진리를 통해야 한다.
천·지·인이 아우러져 하나로 포개지는 우주적인 사건을 우리말 구조가 담고 있다.
다석은 우리의 한글도 한자와 다름없는 뜻 글자의 구실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지을 때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모음 자음이 나름대로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한글의 자음은 입(목구멍·입천장·혀·입술·이)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음의 강도에 따라 삼단계화 하였다. 한글의 모음은 · (天), ㅡ(地), ㅣ(人)을 으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음은 아오(AU, AO)로 읽는다. 본디는 원음(原音)으로 아기가 옹아리 할 때 처음 내는 소리이다. 벙어리가 분화되지 못한 소리를 내는 것도 · 음이다. 원음이 수직으로 내려 사람인 <ㅣ>가 되고, 원음이 수평으로 건너가 땅인 <ㅡ>가 되었다. 원음 · 이 사람(ㅣ) 뒤에 가 <ㅏ(아)>가 되고, 원음 · 이 사람(ㅣ) 앞에 와 <ㅓ(어)>가 된다. · 가 땅인 ㅡ 위에 가서 <ㅗ(오)>가 되고 ㅡ 아래에 와 <ㅜ(우)>가 된다.⑵
원음인 <·>는 빈탕한데에 점 하나를 찍은 형상이다. 그것은 텅빈 무에서 이제 무엇인가 생겨나오는 존재생기, 우주발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발생돼 나오는 태초의 시작을 감탄하며 <·(아)>라고 외치는 형상이다. 다석은 <아침>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하여 아침은 <아 처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이 태초의 <·>에서 계속 발생되어 나오는 우주의 생성은 그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로서 다름 아닌 <한 ·>, 즉 <한아>인 것이다. 이렇게 천·지·인이 아우러져 하나로 포개지는 우주적인 사건을 우리말의 구조가 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씨알,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
다석은 즐겨 쓰는 우리말에 <얼>과 <알>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 내지 <아>는 무엇인가 어둠을 뚫고 생겨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 <아>에 <ㄹ>이 합쳐진 것이 <알>이다. <ㄹ>은 다석에 의하면 바로 변화 그 자체를 나타낸다. 변화의 한 가운데 있음을 바로 이 <ㄹ>이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은 모든 변화를 품고 이제 그 변화를 자신 안에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단계를 표현한다. <씨알>은 바로 그러한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온갖 가능성의 씨를, 모든 변형의 속알을 자신 안에 품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얼>은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어>는 태극점 <·>을 안고 있는 것으로서 태극점이 밖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수정란인 <알>이 세상 빛을 보아 <아이>가 되듯이, 그렇게 태어나기 이전의 태아를 몸에 품고 있는 산모는 <어머니>이며 수정란을 가능케 한 그 부모는 <어버이>인 것처럼 <어>는 <아>로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얼>은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는, 생겨나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런 어떤 것이며,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형상을 갖추지 않고 있는,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형상을 갖추면 더 이상 <얼>이 아닌 것이 된다. <어>에서 밖으로 나와 하늘 아래 땅 위에 서게 되는 것이 <이>이다. 하늘을 이고 땅 위에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마주치고 있는 지금 여기의 <긋>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자신의 바탈을, 속알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인간의 과제가 곧 <일>인 것이다.
다석은 <우주알>에서 터져 나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주전체를 가득 채우고 붙잡고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 곧 <얼>이라고 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싸며 지탱시켜 주고 있는 <한아>의 <얼>을 <한얼>이라고 한다. 그리고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거기에서 마주치고 있는 <긋>으로서의 인간에서 이 한얼은 얼로서 깨어나게 된다. 그래서 다석은 영원한 생명인 <한아님>의 긋이 <나>라고 본다. <긋>자의 가로로 그은 막대기(ㅡ)는 세상이다. 가로 막대기 밑의 시옷(ㅅ)은 사람들이다. 가로 막대기 위의 기역(ㄱ)은 하늘에서 온 정신 곧 얼인데 그 정신(얼)이 땅에 부딪쳐 생긴 것이 사람이다. 정신(얼)이 육체를 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생명은 정신(얼)이다. 이 영원한 얼(한얼)의 긋이 제(자기)긋이며, 그것이 나다. 나는 이제 실제로 여기 있는 이 제긋이다.⑶
보이지 않으며 볼 수 없는 얼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얼굴>이다. <얼굴>은 얼의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링컨도 일찍이, “인간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모양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긋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은 <몸나>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고 <맘나>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되고 <얼나>로 솟나야 된다. 우리는 이렇게 <얼나>로 솟나 얼이 온전한 사람을 <어른(얼온이)>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이 나간 사람, 얼이 빠진 사람, 얼이 뜬 사람, 얼이 썩은 사람들은 <얼간이>, <얼뜨기>, <어리석은 자>라고 부른다. 일상언어에서 드러나고 있는 얼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은 씨알[民]을 위한 글씨
다석은 한 걸음 더 멀리 나가 우리글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읊는 글임을 강조한다. 다석에 의하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꾸 말씀을 사뢰어야 한다. 무슨 말을 사뢰나.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희망으로 목적으로 생명으로 사랑한다고 사뢰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때 살은 것이요, 생각할 때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 사뢰는 소리는 바른 소리로 해야 한다. 그 바른 소리가 우리 글씨의 이름이요 사명이다.
<하루>란 뜻은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오늘을 말한다. <할 우[上]>. 우[上]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일거리를 받아 놓은 오늘이란 우(위)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위하여 짓고 만들고 하면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앞이 훤히 트여질 것이다. 참 잘 밝아질 것이다. 우리 씨알들이 하느님과 영통하여 얻은 진선미란 말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 라는 뜻이라고 류영모는 말하였다.
다석은 한글은 씨알[民]을 위한 글씨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씨알 글씨다. 사제를 위한 라틴어도 아니요, 양반을 위한 한자도 아니다. 오로지 씨알들이 쉬 배워 잘 쓰라는 글이 한글이다. 아니 훈민정음(訓民正音 ― 씨알글씨 · 바른소리 · 옳은 소리)이다. 훈민정음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나타내어야 한다. 훈민정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내어 하느님의 글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훈민정음을 언문이라 암글이라 무시하거나 천대하는 이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글로 경전을 쓰고 철학을 쓰고 문학을 써야 한다. 그것만이 세종에게 보답하는 길이요 겨레를 사랑하는 길이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생각이다.⑷
▶ 다음 편에서는 ‘다석의 통합적 사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911/2.
⑵ 참조 박영호, 앞의 책, 137/8.
⑶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31.
⑷ 참조 박영호, 앞의 책, 134〜36.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