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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처음에, ‘언어’가 계셨다
  • 이기상
  • 등록 2019-10-28 11: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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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적 동물”인가, “언어능력의 생명체”인가 



20세기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한 화두는 언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고 철학의 시작에 규정하였다. 여기서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은 본래 그리스어로는 ‘언어의 능력이 있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세계가 달라지면 낱말과 개념도 달라진다. ‘언어의 능력이 있는 생명체’(zoon logon echon)라는 그리스어가 라틴어(animal rationale)로 번역되면서 ‘이성적인 동물’이 된 것이다. 


그리스인은 이미 그 당시에 인간을 언어와 관련지어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언어를 살펴보면 민족마다 다르다. 언어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언어는 믿을 수 없으며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고 속에 있는 것이다. 말로 표현되기 전에 사유 안(머릿속)에 있는 것이 이성이다. 그것은 사유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어떻게 보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진리의 인식과 표현의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누군가 ‘나는 진리를 보았다’고 주장해서, ‘그 진리를 증명해 보라’고 질문받을 때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표현하려면 말이 필요하다. 


진리에는 경험을 통해 알아보는 인식 차원의 문제가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 남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가 요구된다는 언어 차원의 문제가 있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언어의 문제(표현)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는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성이 하나이듯 언어도, 진리도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그 하나뿐인 언어와 진리는 라틴어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어였다. 여기에는 암암리에 언어를 독점하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인간과 야만인을 구별할 때, 대부분의 이른바 문화민족이 인간과 야만인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언어였다. 그리스 시대에 인간과 야만인을 구별하는 척도는 그리스어로서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은 인간이었고 모르는 사람은 야만인이었다. 그 시대에 이미 민주주의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 민주주의는 그리스어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정치체계였다. 로마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때에는 라틴어를 아는 사람들만이 인간으로 인정받았다.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진리를 알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이성,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이 전제되고 있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예전에 한문을 기준으로 구별하여 한문을 아는 사람은 인간으로 대접받았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야만인, 오랑캐로 여겼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어를 둘러싼 싸움은 매우 치열하였다. 언어를 독점한 지배층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언어와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천민들이 언어를 배워 자신들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중세시대에는 책이라곤 성서 하나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성서에 대한 해설서들이었다. 교회는 이 책들을 자기 아래 두고 그에 해당되지 않는 그 밖의 책들은 모두 금서로 불살라 버리도록 하였다. 언어를 독점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몇 안 되는 지식인들은 그들만이 아는 언어를 다른 사람들이 배워 그들의 영역을 침해할까 우려하여 아예 배울 수 없도록 온갖 장치를 마련하여 배우는 것을 방해하였다.


근대화가 되면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언어 독과점 시대의 종말이다. 철학자들은 하나의 이성, 진리, 언어가 아님을 깨닫는다.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언어가 모두 다른데 어떻게 특정한 언어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진리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진리는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진리는 언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됨을 알게 된다. 


이렇게 언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 언어와 시간을 상징하는 바로 그것, 그 안에 언어와 시간이 농축되어 있는 곳이 바로 몸이다. 몸에는 ‘혀’가 있고 ‘죽음’이 있다. 그전의 이성과 진리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언어, 상징, 이미지, 철학적으로는 현상, 의미, 구조 등이 20세기의 중요한 철학적인 개념들이다. 여기에서 언어와 시간이 만난다. 


“언어는 민족의 기억” : 모국어로 사유하며 학문하기


▲ 훈민정음


처음부터 정해진 보편적 언어, 이성적 언어, 학술 언어란 없다. 우리의 일상언어를 갈고 닦으면 그것이 곧 학술언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언어로, 즉 우리말로 학문[철학]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셈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배운 우리 공동체의 언어인 한글말이 우리의 일상언어이다. 한글은 한국의 언어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소유재이다.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들은 언어의 소유자들이다. 언어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 소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한 언어공동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가장 일반적인 문화재이다. 어떤 인간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언어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언어의 소유는 언어공동체에 대한 소속성으로부터 인간에게서 생겨나며, 인간은 그의 모국어를 습득하면서, 즉 인간은 이 언어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라난다. 사유와 언어의 뗄 수 없는 연관을 염두에 두고 바이스게르버(L. Weisgerber)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장을 편다.


“언어와 더불어 그리고 언어 속에 세계와 그 현상들을 보는 일정한 양식이 갈무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 언어는 그 내적 형식 안에 일정한 세계관을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언어 속으로 들어가 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현상과 정신의 세계를 파악하는 그 언어의 양식을 습득해야 한다. 따라서 한 언어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체험을 그들의 모국어의 내적 형식에 따라 소화하게 되며, 그에 상응하여 사유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스게르버는 언어를 ‘민족의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즉, 과거의 노력에 의해 오늘 우리들이 다다를 수 있는 것은, 그 언어에 갈무리되어 있는 것만이며, 반대로 현재의 우리들이 우리의 모국어 속으로 들어가 성장한다면, 수천 년 동안의 긴 경험들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자연 속에 살면서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온 것이 여기에 놓여 있는데, 이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재로서이며, 이 언어재 안에서 전체 언어공동체가 사유하고 체험하고 행동하며 계속 활동하는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는 그 언어 속에 하나의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언어공동체의 운명, 그 지리적, 역사적 형세, 그 정신적이고 외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그 민족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상태가 두 민족에게 동일하지 않듯이, 이러한 다른 상태에서 생겨난 두 언어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상 역시 같은 것일 수 없다. 언어보다도 한 민족의 운명과 견고하게 결합된 것은 없으며, 한 민족과 그 언어와의 사이보다 더 밀접한 상호작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떻게 한 언어공동체의 공통된 언어를 통해 동일한 세계관이 매개되는가? 우리는 언어에서 낱말을 민족의 기억으로 파악하였다. 즉, 기억은 이전의 체험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계속되는 활동의 토대이기도 하다. 현대인인 우리들과 우리의 모국어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즉 우리 모두가 많은 사유와 행동의 전제를 함께 지니고 있음은 무엇보다도 특히 모국어의 덕택으로 그런 것이다.


언어[말]는 하느님의 마루[뜻]이다.


언어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전제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만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토대가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많은 공동생활과 공동작용에 대한 전제가 어디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한 언어의 효력범위는 한 민족에게 자연적인 영역이 된다. 한 언어에 속하는 모든 이들은 그 어떤 다른 공동체보다도 서로 가까이 있으며,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결합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이스게르버의 논의에서 우리가 우리의 체험내용을 정돈하는 데에도 모국어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의 인식을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모국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의 행위 역시 모국어의 안내를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가 우리는 잘 갈무리되어 있는 세계관을 모국어를 통해 전수받으며 그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 땅의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국어인 우리말에 통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말로 철학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다. 철학함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언어공동체는 운명적으로 서로 사이에 우리말로 결속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석에 의하면, 언어[말]는 하느님의 마루[뜻]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동안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볼 때 류영모는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시도한 최초의 한국 사상가인 셈이다. 류영모는 우리말에 담긴 존재의 소리 또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간관, 생명관, 신관, 가치관을 전개하였다.


먼저 류영모가 우리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따라 가보자. 어떻게 해서 우리말이 우리의 우주관과 신관, 사유의 틀, 생활방식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 다음 편에서는 ‘다석의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안호상, 『철학강론』, 동광당서점, 1942, 69. 최현배 선생도 이런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람이 있는 곳에 말이 있으며, 겨레의 사는 곳에 겨렛말이 산다. 겨렛말은 실로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다. 겨렛말의 소리가 울리는 곳에는 겨레의 정신이 약동하며, 겨렛말이 번지는 곳에는 그 겨레의 생명이 번진다. 그리하여, 겨레와 겨렛말과는 흥망을 같이하며, 성쇠를 같이한다.” 최현배,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정음사,] 1951, 51.


 레오 바이스게르버, 레오 바이스게르버, 『모국어와 정신형성』, 허발 옮김, 문예출판사, 1993, 117.


 참조 레오 바이스게르버, 같은 책, 133.


 참조 레오 바이스게르버, 같은 책, 134. 그런 의미에서 최현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달말은 배달 겨레의 문화의 연장이요, 창조의 결과이다. 문화와 창조가, 한가지로, 자연에 대한 사람의 이상 실현의 정신적 자유를 뜻한다. 그런데, 자유는 정신의 본질이요, 생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의 창조이요, 자유이며, 생명이다.” 최현배,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81.


 레오 바이스게르버, 같은 책, 134.


 같은 책, 136.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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