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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에 생각하는 가톨릭 신앙
  • 이기우
  • 등록 2026-10-09 15: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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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용 성경을 우리 글로 번역한 `성경직해광익`, 우리 글로 창간한 최초의 어린이 잡지 `소년` (사진 = 이기우)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2026.10.9) 

: 갈라 3,7-14; 루카 10,15-26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이래 한글은 중국의 한자문화를 유교의 본령으로 섬겨온 지식층들에 의해 부녀자들이나 상민들이나 쓰는 언문으로 취급 받아 온 역사도 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원리로 이루어진 문자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로 자판을 입력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가장 효율적인 문자가 한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신앙의 선각자들은 언문(諺文)으로 천시되어 오던 한글의 대중적이고도 선교적인 효용성에 눈을 뜬 덕분으로 주요 교리를 4·4조의 한글가사로 된 ‘천주공경가’ 등을 짓기도 하고 한글로 쓰여진 교리서로 ‘주교요지’로 펴냈는가 하면 1784년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직후에 역관 최창현이 한글로 주요 성경을 번역한 전례용 ‘성경직해광익 (聖經直解廣益)’ 등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식층들이 한문을 고집하고 있을 무렵부터 행해 진 이러한 노력은 민중의 복음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 보급을 통한 문화의 복음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후 1960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로 쓰여진 '소년' 잡지를 최초로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이요 신앙은 문화라는 토양에 뿌려지는 복음진리의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문화에 처음 신앙의 씨앗을 뿌리셨고, 예수님께서도 유다인으로 태어나 그들의 율법 문화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중국을 거쳐 처음 들어올 무렵에는 한문으로 표현된 유럽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빚어진 갈등은 박해까지 초래하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의 표현으로 해석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 미술, 조각, 문학 등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도 신앙은 한국적으로 제한 없이 표현되고 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문화에 담긴 가치관에 있어서는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기복신앙으로 나타나는 현세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한글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졌으나, 한국인의 문화에 깃들인 현세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도 큰 숙제입니다. 


오늘 독서로 들으신 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에 사는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으로서 다신교 풍습 속에서 살아가면서 율법적인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다가 바오로를 만나서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 받고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가 그리스 여신상을 숭배하던 우상 숭배 풍습을 비판했다가 돌감옥에 갇혀 있던 무렵에, 예루살렘의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갈라티아 교우들에게 할례를 강요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격분하여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는 유다교의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유로이 실천하는 복음 진리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남긴 많은 편지들 중에서 갈라티아 편지만큼 논쟁적인 글은 없습니다. 복음 진리에 의한 자유론이 그 촛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평소에 이미 여러 차례 구마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냈는데, 이를 시기한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가 11,15)는 중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복음 진리를 믿는 은총과 자유를 전혀 알지 못하던, 이른바 율법주의적 유다교 신앙의 폐해였습니다. 은총과 자유는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율법주의적 유다교 신앙은 원치 않게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 진리를 공격하던 마귀들의 미끼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한국 문화 속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신앙의 메시지를 심는 일이 문화의 복음화 사명이라면, 한국 교회는 한국의 민족에 대하여 영원한 생명의 실체가 복음 진리에서 나오는 은총과 자유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게 해 주는 길임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까지 한글은 한류 문화의 총아(寵兒)로서 전 세계에서,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의 진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열기는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커져갈 전망입니다. 언어 계통상 가까운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민족들 안에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역사적 연원을 공유하는 주요 기본 단어들이 많고, 말의 어순도 같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한글을 배워서 한국의 유서깊은 문화를 배우고, 한국인들이 발달시킨 산업 기술도 익혀서 자신들의 나라도 한국처럼 성장시키기를 원하는 동기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민족에게 한민족은 분단되어 있으면서도 또 전쟁의 아픔을 겪었으면서도 세계 안에서 최상위급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역할 모델'(role model)입니다. 


일본과 중국, 중앙 아시아와 몽골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 안에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안에서 한글 열풍은 점점 커지고 있어서, 이들 젊은 세대가 나라의 중견으로 자라나는 한 세대 후에는 지금보다 더 확연한 변화, 즉 한글과 한국어 사용이 더욱 늘어나리라는 전망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글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배우기 쉬운 문자로서 우수한 문화 유산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로서 한국어의 우수함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어에는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담은 '우리'라는 말과 여기서 비롯된 존대어법이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하늘을 경배해온 경천의식이 깔려 있고 하느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경천 애인'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한글을 중심으로 한 한류 문화는 이 소중한 사상의 발로가 되어 꽃피워야 합니다. 그럴 때 한류의 복음화가 아시아 선교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복음화된 한류가 아시아 여러 민족들 안에 퍼지면, 고질화된 빈곤과 빈부격차의 숙명론이나 종교와 인종과 뿌리깊은 역사적 원한 때문에 끊이지 않아 온 국제 분쟁도 쫓겨나가는 마귀처럼 사라지리라는 희망도 품게 됩니다. 한글과 한국어에 담긴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가치관이 은총과 자유의 그리스도 신앙과 합하여 또 다른 구마 기적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필진정보]
이기우(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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