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9월 16과 17일 마산교구 교육관에서 열린 마산교구 사제연수회에서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이 3회 강연한 내용을 6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예수의 제자교육은 성공하였는가 실패하였는가. 예수의 위기, 제자들과 갈등, 예수의 노선 변화 등을 분석하여 예수를 따르는 참 제자의 길을 알아본다. 예수의 제자교육의 주제는 뚜렷하다. 메시아는 희생자라는 말이다. ‘희생자 메시아’의 모습은 예수가 인류에게 선사한 아름다운 진리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받아들이지도 못하였다. 예수를 떠났던 가난한 사람들도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의 족보, 어린 시절, 부활 이후 발현 등을 참고해도 역사의 예수를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지리적 경계로 나누기보다 신학적 의도가 담긴 구분을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주목하겠다.
예수의 갈릴래아 위기
사람들은 왜 예수를 버리고 떠났는가?(요한 6,66) 예수의 치유 기적, 빵의 기적, 위로의 말씀만 가지고도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다니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예수를 버리고 떠났는가.
사람들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에 기뻐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를 메시아로 여긴 것 같지 않다. 예수가 독립투쟁에 대한 의지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역할이 없는 메시아를 식민지 시대를 살던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기껏해야 병 치유자, 마귀를 쫓아낸 자, 지혜로운 사람 정도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과 특히 여성제자들은 왜 예수를 떠나지 않았을까.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는가. 제자들은 예수의 신분에 대한 최종 평가를 아직 내리지 않은 것 같다.
예수와 제자들의 갈등
베드로는 왜 예수를 말리기 시작하였나(마르코 8,32).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직후에 예수와 노선 투쟁을 벌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예수와 다툼도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제자단 전체의 의견을 담은 집단행동인 것 같다. 제자 누구도 베드로가 예수를 나무라는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물론 복음사가의 신학적 의도가 개입된 이야기겠다.
베드로는 예수의 메시아 노선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메시아가 희생자라는 개념은 유다교에 없었으니 말이다. 부활을 아직 모르는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다닌 이유는 무엇일까. 제자들과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였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예수를 떠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권력의지 때문 아니었을까. 어느 방식으로든 예수는 메시아로 승리자가 될 것으로 믿었으니 말이다. 이것 외에 사람들과 제자들의 차이를 뚜렷이 구분하긴 어렵다.
제자들은 예수의 노선을 찬성하였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베드로 혼자 예수와 논쟁한 것이 아니라 제자단 모두와 예수가 노선투쟁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수가 자신의 수난과 죽음 예고를 세 번이나 했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그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음을 강하게 반증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설득하는데 아주 애썼던 것 같다.
제자들 사이의 권력다툼은 일찍 시작되었다. 예수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자 제자들은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려는 논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제자들이 살아있을 동안 제자들에게 모욕적인 전승들을 복음사가들이 창작했을 리 없다. 복음서는 그토록 정직하다. 교회사 학자들도 복음서 저자들의 정직을 배워야 한다.
열두 제자들은 왜 예수 십자가 장면에서 도망쳤나. 예수의 삶은 실패했다고 제자들은 여겼을 것이다. 예수의 말을 믿었다면 제자들은 며칠만 참고 꿋꿋이 버텼을 것이다. 곧 영광의 시간이 시작되지 않는가.
여자 제자들은 왜 십자가 장면에서 도망치지 않았는가. 이상하다. 남자 제자들보다 예수에게서 한 걸음 멀리 떨어져있던 그녀들 아닌가. 여자 제자들은 권력다툼을 그녀들 사이에 해본 적 없다. 그것이 여자제자들과 남자제자들의 결정적 차이 아닐까. 사제 서품 후 돈과 권력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사제의 삶이 사실 돈과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예수의 노선 변화
예루살렘 가는 여정에서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는 크게 줄어들었다. 치유 기적은 줄어들고, 빵의 기적은 사라졌다. 예수는 이른바 대중노선을 포기한 것 같다. 그 대신 소수의 제자교육에 집중한 것 같다. 예수의 전략이 많이 바뀐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에 대한 강조는 줄어들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행복선언은 갈릴래아 시절의 이야기다. 예수는 갈릴래아 시절에 십자가 죽음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본격적으로 제자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예수는 수난 받고 죽임당할 것이다. 둘째,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사제들이 사순절에 담배를 일시 중단한다는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예수처럼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중과 제자들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갈릴래아 시절 주인공은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은 조연에 불과하다.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주인공은 예수와 제자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끔 조연으로 끼어든다. 예루살렘에서 주인공은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과 예수였다. 제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조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