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어떻게 읽을것인가’라는 주제로 곽건용 목사가 6회에 걸쳐 설교했던 내용을 원고로 나누어 올립니다.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5편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만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여호수아 10:1-15)
보편윤리가 늘 옳지는 않다
보편윤리나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가르침이라도 예외 없이 늘 옳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보편윤리에서나 성서의 전통에서나 모두 옳지만 상황에 따라서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차 대전 중에 나치군인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유대인을 색출하고 있었습니다. 찾으면 수용소로 보내서 결국 죽이려는 겁니다. 우리 집에 유대인 어린아이 하나가 숨어 있었는데 나치군인이 우리 집에 와서 “여기 유대인 없어?”라고 물었다고 칩니다. 이때 없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실대로 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게 되고 있다고 말하면 유대인 어린이는 죽을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게 옳습니까? 대답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거짓말보다는 살인이 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 어떤 국가고시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면접에서 국정교과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십중팔구 불합격할 텐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정교과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해서 불합격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너희들 속셈이 뭔지 잘 아니까 내가 이번엔 거짓말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바로잡으리라’라고 다짐하며 “국정교과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하지요? 앞에서 얘기한 유대인 어린아이의 경우보다는 더 결정하기 어렵지요?
9.11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칩시다. 비행기를 탈취한 테러범이 대량살상을 저지르려 한다면 그 비행기를 격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거기에 많은 어린이들이 타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비행기를 격추하기 전에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서 테러범을 소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듯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굳이 하느님을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 대량학살을 직접 명령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직접 하느님이 대량살상을 저지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느님이 그런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구약성서 학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그런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고 또 실제로 대량학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서는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고 이스라엘은 그걸 수행했다고 말할까요?
이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잘못 알았고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믿고 행했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그렇게 오해했다는 것이지요.
이 대답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량학살의 경우에만 하느님을 잘못 믿은 것이 아니라 그게 그 시대의 한계였다고 지난 글에서 얘기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종족의 신앙은 종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종족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은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종교학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말입니다. 다만 구약성서의 종교에 이 개념을 적용한 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종교를 종족신앙으로 보는 것이 그걸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들도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면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대량학살(정말 저질렀다면)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냥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죄악이죠.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들도 혼란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문제라고 느꼈다는 얘기입니다. 옳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게 야훼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더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하느님과 ‘정의’의 문제를 두고 한판 맞장을 떴던 욥이 등장하려면 수백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라는 야훼의 명령과, 그들과 비슷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웃인 가나안 종족들을 어떻게 멸절할 수 있겠냐고 하는 보편윤리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갈등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역대기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아온 에돔 군인 일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 얘기와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성전을 지을 수 없었다는 얘기는 그들이 가나안 종족을 죽이는 문제를 두고 얼마나 깊이 고뇌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인 여호수아 10장도 비슷한 예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평화조약을 맺은 기브온 주민 얘기가 나옵니다. 기브온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 중 하나인 히위 족속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가나안 종속의 일원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멸절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여호수아를 속여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 9장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절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자기들도 죽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으려고 꾀를 냈습니다. 거지꼴로 이스라엘을 찾아가서 자기들은 먼 곳에서 왔다면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행색을 보아하니 먼 곳에서 온 것 같지 않아서 의심했지만 이들이 자기들을 믿고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묻지도 않고 이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조약을 맺고 맹세했기 때문에 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0장은 가나안 종족들이 소문을 듣고 기브온에 쳐들어왔다고 이에 이스라엘이 기브온 주민을 도와 싸웠다고 전합니다.
이 에피소드가 뭘 보여줍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나안 종족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브온 주민은 문명 가나안 종족의 일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더욱이 이게 유일한 예외도 아닙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이와 비슷한 얘기들, 곧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걸 다 찾아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가나안 종족을 ‘내쫓으라’는 명령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쫓아내든 죽이든 둘 중 하나를 해야지,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기 사는 종족들을 다 몰아내겠다고 말씀했다고도 전합니다. 이런 모순과 불일치에서 우리는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명령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뇌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더 큰 문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대로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성서가 이집트의 장자들을 몰살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고, 하느님이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으라는 겁니다. 대량학살을 명령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상당히 많습니다. 모호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명명백백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의심하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도 야훼의 명령이 무자비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렇게 명령했다면 거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숨 쉬는 것은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성서에 적혀 있는 대로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지르면 안 되는 막중한 범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살인 금지가 모두 마찬가지로 보편윤리에 속하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살인에 정상이 참작되는 경우가 있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어린이를 우선적으로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서대로라면 야훼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무자비한 신이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행위를 명령한 신이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이런 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물론 하느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몰살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해야 할 뭔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선을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이 왜 그런지 설명을 해주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 살인은 죽는 사람뿐 아니라 죽이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첫 번째 글에서 얘기했습니다.(관련글보기)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인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 하라고 명령했다면 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엄청난 상처를 준 셈입니다.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하느님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만일 그럴 줄 몰랐다면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줘가면서 다른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하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바른 신앙은 무균실 안에 안전하게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왜 가나안 종족을 죽이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성서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데 신명기 20장 16-18절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 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몰살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고 온갖 역겨운 일들을 그들에게 배워서 죄를 지을 터이니 모조리 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종족은 일종의 ‘전염병’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같이 있으면 몹쓸 병이 전염되니까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웬만한 병은 스스로 극복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그럼 야훼 신앙은 가나안 종족의 신앙보다 약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훼 신앙이 얼마나 연약하면 가나안 종족의 신앙은 접촉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 말입니다. 가나안 종족의 신앙이 악하다면 올바른 야훼 신앙으로 그걸 극복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굳이 그들을 내쫓거나 죽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게 아니라 선으로 악을 극복해야 한다면 가나안 종족을 몰살하는 게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겁니다.
올바른 신앙이 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악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다 쫓아내거나 죽여 버리고 무균실 같은 데서 고고하게 사는 게 좋은 신앙일까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더럽고 때 묻은 세상에서 존속할 수 없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일까요?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뭔가를 얘기하셨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거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산 아래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거기에 살면 내가 더러워진다고 해도 거기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로 내려와야 했던 겁니다.
좋은 종교가 뭘까요? 올바른 신앙이 뭡니까? 더럽고 추한 것 모두 없애버리고 세상을 무균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절대 무균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고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정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더러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조건 잘못 믿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믿었든 그것과 상관없이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은 그런 명령을 주실 리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