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3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3부는 각각 ‘욕망과 지배’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탐욕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욕망과 지배
마지막 계명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에 품고 있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서에서 ‘욕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인 창세기 3장 16절이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한글성경이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해서 원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참고해야겠지요. 우선 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후반절은 모두 남편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뜻이지만 상반절의 경우는 개역개정판은 ‘남편을 원한다’고 번역해서 ‘남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번역한 나머지 두 번역본과 내용이 다릅니다. 어느 번역본을 택하느냐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예외 없이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하겠고(또는 위한 것이고)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트슈카’는 ‘너의 갈망’(your longing, desire)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남녀평등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구절은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었을 때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쓰였을 당시에는 중동지역 어디서도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사정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서 적어도 문명사회에서는 대놓고 남녀불평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성서시대처럼 사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읽으려면 오늘의 상황에 맞춰서 새롭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드러난 ‘욕망과 지배’의 관계입니다. 곧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라는 말과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두 서술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째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병렬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이 어떤 식으로든 묶여 있지 않고 전혀 별개란 얘기입니다. 원문에서 둘은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둘째로, 둘 사이의 연결사를 ‘그러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또는 ‘그러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너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은 너는 지배할 것이다”로 읽힙니다. 아내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이 아내의 욕망을 누르며 지배할 거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셋째로, 흔치는 않지만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왜냐하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남편을 욕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너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듯 연결사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문장의 뜻이 달라집니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는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쪽을 택해야겠지요.
어느 편을 택하든 이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체로 네 가지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하는 경우, 둘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받는 경우, 셋째는 때에 따라 지배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지배받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네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저는 영화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욕망과 지배의 역설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네 번째 경우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