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2015년 한국 사회의 겉모습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조1975억 달러, 경제규모 세계 15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6244달러~3만535달러, 고등학교 이수율(98%)과 전문대학 이상 고등교육 이수율(64%) OECD 1위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평등, 빈곤, 빈약한 사회안전망이 사람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1년이 넘도록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고사하고 오히려, 당시 승조원들 33명이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국민들을 씁쓸하게 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해킹사건은 온 국민을 놀라게 하였고, ‘국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사찰을 진행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물질적인 풍요함에 비해 대다수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상황이다. 무기력과 무력함,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이 최고 수준이다. 최근 자살률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은 30~50대 남성 자살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50대 남성의 자살률은 2012년 53.2명에서 2013년 58명으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40대 남성의 자살률은 42.9명에서 47.2명으로, 30대 남성은 34.6명에서 36.4명으로 늘었다. 65세 이상 노인자살률 또한 매우 심각하다.
OECD 회원국들의 평균을 보면, 노인자살률이 2000년 22.5명(인구 10만명당)에서 2010년 20.9명으로 줄어들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34.2명에서 80.3명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이와 동시에 아이를 낳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가임 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수)은 2010년 기준 1.23명으로 OECD회원국 (평균 1.74명)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한국형 자살의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와 가정의 무거운 짐을 진 가장들의 절망적 죽음과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노인들의 자살은 이 사회가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살은 자기생명을 중단함으로써 공동체를 탈출하는 것이고, 저출산은 생명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생명과 죽음에 아무런 관심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린다. 달려왔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고도의 경쟁사회를 만들었다. 스트레스성 질환의 줄기인 과잉행동장애(ADHD)가 유치원 아이부터 나타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는 높아져 중고생의 절반가량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도 45세에서 59세 장년층 남자들 5명 가운데 한 명은 우울증 환자이고, 그 중 3분의 2가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조사결과는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자살률 가운데 삶의 절정인 40-50대에서 가장 높은 비율 33%를 보인다.
세대 간 층간소음으로 살인이 난무하고, 도로에서는 보복운전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불안사회, 분노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교황은 ‘청와대’에서 객관적 타자로서 한국사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교황 프란치스코, 8월 14일 한국 도착 후 청와대 연설 전문>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오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되어서, 또 무엇보다 한국의 국민들과 그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대낮의 열기와 한밤의 어둠은,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향한 불멸의 희망을 품고 있는 아침의 고요함에 언제나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희망은 얼마나 위대한 선물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이 목표들을, 한국 국민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과 세계를 위해, 결코 좌절하지 말고 추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통령님과 정부 요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외교관 여러분에게, 국가 공직자들과 군 관계자들에게 그리고 저의 방한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금방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은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를 계기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 대회는 이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모인 가톨릭 청년들이 그들의 공통 신앙을 경축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또한 이번 방한 중에 그리스도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릴 것입니다. 이 두 행사는 서로를 보완합니다. 한국의 문화는 연장자들의 고유한 품위와 지혜를 잘 이해하며, 사회 안에서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우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선조들을 공경합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른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혜롭고 위대한 민족은 선조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젊은이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아 현재의 도전들에 적용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청년 대회와 같이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희망과 관심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다음 세대에 얼마나 잘 전해 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세상과 사회를 그들에게 물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라는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평화라는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부재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이 땅 한국에서는, 이러한 호소가 더욱 절실하게 들릴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 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그러한 노력만이 지속적인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입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별히 여러분 중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외교 활동에 종사하여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더 큰 도전입니다. 이는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입니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며,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합니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 평화 건설에 헌신하며,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결의를 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여러분은 국가와 정치의 지도자로서 궁극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 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이 나라가 앞장서 주기를 바랍니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25년 전에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시면서, “한국의 미래는 이 국민들 가운데 현명하고 덕망 있고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다.”(1989년 10월 8일)는 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오늘 저는 한국 가톨릭 공동체가 이 나라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계속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이바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정신이 자라나게 하여, 새로운 세대의 국민을 양성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전망으로 국가가 당면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준비를 갖출 것입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과 환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인 연장자들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우리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은 겉으로는 문화적 교양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속물적’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 사회가 ‘천박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이 시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관계주의, 현세주의 및 배상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현실적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기복심리가 바탕에 가득하다. 복을 추구하되 인생의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높은 정신적 경지도 아니고 근대국가 시민정신이 쟁취해온 인류보편의 이념도 아니다. 더구나 사회정의 구현을 외면한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감, 공정경쟁의 틀과 법이 무너진 사회 구조악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승자독식의 비정한 약육강식의 사회 현실에 대한 생존본능의 반응이 사회를 이토록 각박하게 만들었다. (김문조, 『한국인은 누구인가?』, 21세기 북스, 2013.)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황이 정의한 바 ‘정의’라는 단어이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다. 정의롭지 못하면 절대 평화로울 수 없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정의’를 세우는데 실패했다.
반민족특위의 무력화로 친일세력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시 권력에 기생하는 기회를 준 것이 오늘날 이 사회의 이러한 불의와 무기력을 만든 원천이 된 것이다. 어찌보면 최근에 흥행하는 ‘암살’이라는 영화가 천 만의 대중을 모아들인 것은 지금 이 사회의 불의와 부정의 뿌리와 원천을 찾아가려고 하는 시대정신일 수 있다.
풀어야 할 것을 풀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영혼은 슬픔에 압도되고 이성은 순간순간 아픔의 기억으로 정상적인 작동이 어렵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의미와 가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마땅히 풀어야 할 일을 풀지 않고, 해결해야 할 일을 해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종종 경험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집단적 불행감, 혹은 집단죄의식이다. 이것은 또한 사회적인 무기력과 우울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한국사회는 적나라한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이 사회가 쏟아내는 말의 줄기들과 잎새들을 보자! 세월호사건의 유가족들은 이익(利)을 위해 싸우고 단식하고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외침은 의(義)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너진 이 땅의 정의와 공정을 회복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과 밝히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왜 그들은 감추려고 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부당하게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추고 숨기고 덮으려 하다가 마침내는 ‘수장’이라는 엄청난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 가정이 이렇게 병들어 있는데도 우리는 계속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인가? 그저 열심히 달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일까? 우리는 물질세계에 압도당해 보이지 않는 것들과 영적 가치들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신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물질세계의 풍요가 우리들 행복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늦은 지금에 와서 깨닫게 되고 상처받은 영혼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의 죄의식과 슬픔에 압도되어 이렇게 내적으로 공허하고 외로운 것이다. 이제 잠에게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듣고 바라보아야 한다.
연재 그 세 번째 시간에는 [번영의 신학을 경계하라!] 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