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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민주화”에 대한 신학적 모색
  • 편집국
  • 등록 2015-04-15 20:06:17
  • 수정 2015-06-08 16:4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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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여진다. 경제, 정치, 문화 부분에서 놀라울만한 성장을 일구어내며, 사회의 민주화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노동과 인권의 문제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공동선이라는 입장에서 보편적 의제로 떠오르고, 노동부문에 있어서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비약적인 발전과 성과를 이루어 내기 시작하였다.


암울한 군사독재, 유신의 시대를 거쳐 또 다른 군사독재의 연장 가운데, 가톨릭교회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역할과 투신은 유신의 망령을 끝내는 기폭제가 되었고, 80년 광주민중항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며 군부독재의 허상을 일깨우는 데에 지학순 주교와 박창신 신부의 공헌은 지대했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역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역할이 컸다. 89년의 임수경 수산나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 역시 통일의 문제를 관주도에서 민간에게로 넘어오게 하며 민족 통일이 시대의 과제임을 온 겨레에게 알리는 중요한 기점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냉혹하게 말해서 이 시기 교회의 장상들은 시대의 부르심과 예언자적 역할을 외면했다. 그리고 ‘순명’, ‘하느님의 명령은 주교를 통해 내려진다.’, ‘주교에게 순명하는 이는 틀릴 수 없다’, ‘주교가 교회다’ 라는 발언으로 여타의 토론을 불가의 영역으로 봉쇄해 버렸다.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 그리고 평신도 신자들까지도 상식에 어긋난 교도권의 지시나 결정에 대하여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교회 언론이나 장상들은 극히 주관적인 식견으로 사제들이나 신자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자주 보여왔다. 오늘날의 사회는 전문화된 인식과 정보와 가치가 상식 안에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사제들은 상식에 어긋난 교도권의 지시나 행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니면서도, 인사권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로 인해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또는 모르는 척, 교회운영에 무관심한 자세로 살아간다.


교회의 민주화와 교계제도는 과연 늘 충돌하는 것인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이제민 신부는 저서 『교회-순결한 창녀』에서 “한국교회는 철저히 성직자 중심의 교회이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공의회의 정신은 이미 빛 바랜 사진 속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순명’이라는 대의(?)로 강요되는 중세의 상명하달식 명령체계와 교구장 주교의 막대한 통치권은 하위 성직자들의 자율성과 함께 신자들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교회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봉사를 자못 성직자에 대한 봉사로 착각하며 스스로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나간다. 한국교회는 전근대적인 권위주의체계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며 현실의 제도 안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노출한다.”고 말한다.


간명하고 정확한 지적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비민주적인 ‘성직자중심주의’ 교계제도와 잘못된 소통체계 문제가 있다. 비 민주적인 교회운영이 어디 개신교만의 문제인가?


그들이 자녀들에게 목회직을 세습하는 것을 은근히 비판하면서 우리들 가톨릭 교회의 도덕성과 우월성을 말하지만 가톨릭 교회 역시 비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전문적이지 못한 교회 운영자들로 인해 중 장기적인 미래의 모색은커녕 당면한 문제 안에서도 맴맴 돌고 있는 후진적인 시스템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교회의 의사 소통구조와 의사결정 방식에 있어 평신도와 평신도, 평신도와 사제, 사제와 사제간, 사제와 주교간의 사랑에 넘친 대화 없이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기는 힘들다.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하여 ‘현상 유지 사목’은 사라지고, ‘복음에 근거한 사목’이 실현될 가능성이 열릴 것인데 지금의 한국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화’, 사회의 ‘그리스도화’를 말하지만, 오히려 교회 내부는 그런 구호들이나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복음적이지 못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한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실상 이런 한국교회의 권위적인 행보는 21세기 변화하는 사목환경에 대한 탄력 있는 대응을 어렵게 한다.


주교와 사제는 흔히 부모와 자식관계로 표현된다. “주교들은 언제나 특별한 사랑으로 사제들을 감싸주고, 아들처럼 친구처럼 여기며, 그들의 의견을 기꺼이 듣고 그들과 신뢰관계를 이루어 교구 사목의 모든 활동을 추진하도록 힘써야 한다”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16항). 사목은 상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신학 내부에서는 아직도 ‘상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면에서 ‘탈중앙’ 이라는 중요한 표현을 구사한다. 그렇다면 교구도 ‘탈주교 중심’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 대안의 하나로 지구장 제도를 실시한다고 하면, 지구장에게 인사권과 예산권을 부여하여 지역자치, 권력의 분화(분권)로 중심에서 포착하지 못하는 지구의 사목현안들에 대해 자율성과 자치권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당 지구 안에서 사제단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살아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본당 운영 역시 ‘탈 성직자, 탈 수도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본당 운영의 모든 권한이 사제와 수도자에게 집중되어 평신도 협의회나 사목회가 있다 하여도 유명무실이고, 대부분 사제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채워지거나,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사들로 구성하여 큰 무리 없이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선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교회 운영에 실망하고, 또 선출된 이들의 성숙하지 못한 신앙과 삶의 태도로 상처 받은 이들이 냉담의 길로 접어드는 것도 다반사다.


곧 이러한 교회의 운영과 구조는 인류가 오랜 싸움을 통해 획득한 의사소통의 합리적 구조이자 약속인 ‘민주주의’의 대의와 원칙을 역행하는 비합리적 운영이다. 민주주의는 상식을 수렴하는 민중을 위한 의사결정의 구조일 뿐 아니라 소통의 합리적인 방법이다. 이것을 교회가 그리고 의로우신 하느님이 외면할 이유가 있을까? 없다. 전혀 없다.


‘바라본다’는 것은 ‘알아보기’ 위한 전제이다. 알아보게 되면 넘어서 보게 되고, 꿰뚫어 보게 된다. 올바로 보게 된다면 올바로 살 수 있고, 올바로 살 수 있다면 세상은 나로부터 변하게 될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낙담하여 길을 걷는 동안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길 위에서 예수가 모든 예언서와 율법서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사건들을 설명하자 알아보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자 그들은 넘어서 보게 된다. (루카 23,13-35) 이제 교계제도는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가 교계제도를 만들지는 않았다. 로마가 만들었고, 로마가 가꾸어 온 것이 교계제도라는 것을 꽤 뚫어 보아야 한다.


성직자주의, 중앙집권, 권력집중, 관료주의, 상명하복 등의 ‘반민주적 문화’는 분명히 복음적이지 않다. 더구나 어느 정도 민주화된 사회에 익숙한 21세기의 한국 신자들 사이에 가톨릭 교회는 권위적인 성직체계로 규정된 지 오래다. 바로 한국가톨릭교회에 ‘더 민주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교회에서는 왠지 낯설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공의회 정신’이라 규정하며 갈등을 회피해 나가는 것도 솔직하지 않다. 신학적으로 보면, 모두가 참여하고, 모든 것을 논의할 수 있고, 막힘 없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나눌 수 있으며,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일치를 지향하며, 복음적이고, 교회 전통에 충실한 소통의 구조.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교계제도’에 대한 현대적 과제이고, 교회는 이것에 대한 충분한 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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