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혜경) 일리치의 에피메테우스적 인류를 고대함
  • 김혜경
  • 등록 2015-10-01 15:58:14
  • 수정 2015-11-04 11:08:27

기사수정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교육과 교통, 에너지, 젠더문제에서 물질과 문자의 역사까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넘나들며 삶의 문제를 탐구했던 가톨릭 신부다. 대학부총장이라는 직에서 물러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곳마다 공동체를 만들었고 평생 스스로 질문하면서 자신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로마 교황청과 마찰도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공부하고 실천했던 진정한 가톨릭 사제. <학교 없는 사회>(1971)를 필두로 <성장을 멈춰라>(1973),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1974),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6) 등 내는 책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1970년대, 일리치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스타 신부였다. 


일리치는 언어에도 주목했다. 그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와 삶의 틀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언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은 물론, 삶의 방식까지도 결정한다는 건데 그만큼 언어에 대단히 민감한 분이었다. 일리치가 드는 예 가운데 특별히 나는 ‘생명’이라는 낱말에 꽂혔다. 요즈음 관심 있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생명’이라고 하면, ‘생’,‘명’이라고 소리 낼 때 무언가 생생한, 살아 움직이는, 꿈틀대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주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그것을 향해 마구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하는 그런 낱말이다. 


흔히 ‘생명’이라는 말은 지구상의 생물체를 일컬을 때 쓰기도 하고 인간의 수정란을 생명의 시작이라고 하는 등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명사로 쓴다. 의사나 생명윤리학자들도 생명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어떻든 살아있는 무엇을 지칭하기 때문에 ‘책임져야’하고 잘 ‘관리해야’ 할 낱말로 보인다. 그런데 일리치는 ‘생명’에 대한 이런 생각은 잘못이란다. 애초부터 ‘생명’은 그 정도 수준으로 그렇게 쓰일 말이 아니라는 거다. 


일리치가 말하는 ‘생명’은 신부님답게 종교적-물론 그리스도교적―이다. 좀 거칠게 말해 보자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세상, 즉 자연을 신이 창조했고 이 세상(자연)은 신 안에서 살아있는 상태인 생명을 유지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세상(자연)의 살아 있음, 그 살아 있음의 근거는 ‘생명’인 신(하느님)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이 스스로 자기를 내어줌-육화(肉化)-을 통해 사람 예수가 되었고, 예수는 그러한 신을 드러내는 ‘은유’로써 인류에게 은총, 구원, 사랑, 자비와 같은 신의 속성을 보여준다. 성서의 <요한복음>에 예수가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해 일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유일한 ‘생명’이 우리 믿음의 실체다. 이 ‘생명’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졌고 십자가의 길 위가 아니면 이 ‘생명’을 찾을 수 없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이 ‘생명’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생명’은 무조건적이다. 태어남과 살아 있음을 넘어서는, 그보다 더 위의 것이다”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p63)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수 스스로 목숨을 내어줄 만큼 철저한 자기―비움, 자기―내어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리치에게 ‘생명’은 단순한 살아있음이 아니다. 그저 숨을 쉬고 있다거나 목숨이 붙어있는 무엇이 아니다. ‘생명’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동시에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신이 신 자신을 스스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에게 내어준, 말 그대로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타락하면서 인간이 인간을 책임지고 우주를 책임진다는 관념이 생겼다. 이제 인간은 우주를 책임져야하므로 손안에 우주를 놓고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세계를 만들고 또 개조하고자 과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생명’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생명을 더 낫게 만들고, 생명을 되찾고,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육화(肉化)한 신을 가리키는 ‘생명’이라는 낱말이 이제는 거룩한 인격과의 연관성을 잃고 일종의 자원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생명은 조작의 대상, 책임의 대상, 관리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니 일리치가 “(그런) 생명은 지옥으로!”라 외칠 만도 했다. 일리치가 생각하는 ‘생명’은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낱말이었다.


일리치는 ‘생명’ 뿐 아니라 별 생각 없이 썼던 낱말이나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놓는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려 목매고 다녔던 학교라든지, 아플 때 병을 고쳐준 고마운 병원, 가고 싶거나 가야할 곳을 단번에 날라다 주는 고속도로들에 대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개인차를 무시한 채 똑같은 순서로 가르치는, ‘학교 다니는 일’은 ‘학습’이 아니다. 제도화된 학교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사회마저 학교화 한다. 병원은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고 없애주는 곳인데, 이제는 환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죽음을 관리하려 한다. 또 고속도로를 타면 오직 도착지점을 향하여 앞만 보며 무작정 달려야 한다. 주변 풍경을 즐길 이유도, 여유도 없다…’ 등등. 


이렇게 산업이 과잉성장하면 할수록 인간의 자율성은 마비되고 제도화 한단다. 그래서 점점 더 제도와 체제에 의존하게 되고, 새로운 제도와 체제들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인은 이제 자신이 만든 인공적 환경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개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인간의 자율성이 마비되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일리치는 당장 끊으란다. 이제 그만 개발이나 발전은 되었다고, 사실 그것은 발전도 뭣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일리치는 그 대안으로 “공생”을 말하는데, 그것은 개인의 자유가 온전히 실현되면서도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교류가 가능한 상호의존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일리치가 말하는 이상적 인류,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 재탄생해야 할 것 같다. ‘생명’이 무언지 진짜 제대로 알고,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 


그는 말이나 생각에 앞서 그동안 다져진 앎과 삶에 따라 그저 묵묵히 나아간다. 저절로 몸이 먼저 나서고 나중에 생각이 따라와도 척척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곁에서 그를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향상 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스스로를 연마하는 게 아니라, 곁에 있는 벗을 돕기 위해 나의 능력을 끌어 올리려는 것이 목적인 사람이다.


요즘처럼 한 치라도 남보다 앞서려고 너나없이 스펙 쌓기에 여념 없는 세상에 참 천하태평인, 어쩌면 바보스런 사람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세상이 필요로 하고 자연이 원하는 사람, 우리가 꿈꾸는 진짜배기 우정을 나눌 벗은 이렇게 좀 어리석고 우둔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지 싶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너른고을문학회원이며,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