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은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는 예수회 창설자 가운데 한명이자 동방선교의 수호성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축일이다. 장애인 인권운동에서는 유엔 세계장애인의 날이다. 그리고 평화운동에서는 평화적 신념으로 집총과 명령을 거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감옥에 갇힌 평화수감자의 날이다. 세계장애인의 날과 평화수감자의 날은 대한민국 달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이다.
두 개의 날 가운데 세계장애인의 날에 대해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장애인의 날은 4월 20일이다. 이 날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장애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해 만들어준 날이다. 이 날은 장애를 “극복”했다는 사람들을 모아 상을 주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영상과 기사들이 대중매체로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지적하는 보도도 언론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사회문화 현상은 장애인들의 인권 현실에는 눈을 감고 동정과 극복으로만 바라보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대구대학교 조한진 교수와 정중규 박사 그리고 서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도현 선생 등 여러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해마다 지적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문제로 접근하겠다.
12월 3일, 유엔에서 만든 '세계장애인의 날'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투쟁의 산물이다. 의료전문가들과 사회사업전문가들이 끝없는 논쟁을 통해 장애인 인권을 고민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아직까지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지만 인권과 복지수준 향상을 이끌어 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도 장애인 인권에 대해 신경을 쓴다고 한다.
여기서 최근에 열린 세계 주교 시노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시노드의 주제는 가정 또는 가족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가족의 구성도 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변화된 가족 가운데 동성애 가족도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했다. 보수측들이 반발했다. 여기서 언론보도가 문제 되었다.
서구언론들의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 문제다. 언론이 교황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동성애 주제를 너무 깊이 끌고 가는 바람에, 교황이 시노드에서 다루려 했던 빈곤가정에 대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빈곤가정 주제가 교황의 관심거리였는데 언론은 비중을 적게 두었던 것이다. 심지어 참석주교들 또한 빈곤가정에 관심을 적게 가졌다.
시노드에서 장애인 가족은 중요한 주제임에도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주교들의 장애인 인권감수성이 약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작년 교황방한 때 교황대사와 주교회의의 태도를 보면 장애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형편없고 가톨릭적이지 않았는지 필자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통해 다룬 적이 있다. 주교들은 여전히 장애인에 대해서는 '시설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최근 들어 황종렬 선생과 정중규 선생 같은 장애인 신학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서울대교구에서는 청각장애인 박민서 신부(그 이전에는 대구대교구의 허연구 신부)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시설이 있는 성당도 늘어나고 장애인들의 전례참여도 늘어났다. 많은 장애인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가 홈페이지 수도회 입회자격란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이라는 문구를 삭제(사실 이 문구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해서 삭제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한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사목부나 교회 장애인독립생활센터 등의 인권센터가 없는 교구가 많고 장애인들의 전례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본당도 많다. 꽃동네와 오순절로 대표되는 반인권적이고 가톨릭적이지 않은 시설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예수는 장애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치유들은 장애인들을 교회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는 장애인들을 사람으로 사랑했지만 주교들은 장애인들을 자신의 권위를 위해 이용하고 그들의 현실과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 빈곤가족들과 함께 장애인가족에도 관심 있는 언론과 주교들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