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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과 사회교리적 접근 방식 -3-
  • 김영범
  • 등록 2015-12-29 1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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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1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이사야 58,9ㄷ~14)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오늘의 묵상: 어떤 일에서나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상대방의 심정’ 으로 이해하는 태도이다. 좀 어려운 말로는, ‘존재론적-관계론적 세계관’이라 하는데, 관계론적 세계관은 ‘공동체 영성’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의 태도는 너와 나의 경계를 가른다. 무엇보다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로 판단하며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타인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동정심이나 배려도 없다. 공부 못하고, 가난하고, 감옥에 가는 것도 모두 그 자신의 문제로만 규정한다. 


그러나 공동체 영성을 가진 이는 세상의 사건들이 자신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사회적 책임감을 느낀다. 슬퍼하는 마음을 공유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인정의 손길을 내민다. 강도를 만난 이웃에게 참된 이웃이 된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처럼 말이다.


어느 시인은 ‘몸의 중심은 뇌나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라고 했다. 아픈 곳에 손이 가고 기도가 있다. ‘공동체에는 아픈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세리와 병자와 죄인들을 마주한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들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시며 치유를 베푸셨다. 너와 나의 구분뿐 아니라 죄인과 선인의 경계가 없어졌으므로, 그냥 병자에게는 의사가, 고독한 이에게는 친구가 되신다. 그래서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서로 한 몸인 공동체를 만드시니, 세리들이나 죄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한다. 


경계가 없으면 존재하는 만물이 공동체다. 서로를 한 몸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영성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이고 신학의 핵심이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환경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인간은 깊이 각인해야 합니다. 사회교리는 정의와 평화, 환경, 노동, 생명… 그 외에도 현대의 문제가 되는 모든 것들을 다룹니다. 그 중 ‘노동’에 관한 신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 1월 20일 연중 제 2주간 화요일


-1독서 :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 합니다.(히브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2,23~28)


-오늘의 묵상: …(선략) “근로 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횃불로 만든 청년 전태일을 생각한다. 환풍기 하나 없는 칙칙한 다락방에서 하루 16시간 이상씩 노동해야 했던 개발 독재 시절, 사람은 모자라고 수출 달성과 경제 성장, 총력안보 구호만 나부끼던 비정의 시대였다. 약자인 노동자로서 차마 법을 어길 수는 없고 제 몸을 불살라 법을 지키라고 항의하며 스스로 횃불이 되었던 그의 죽음 앞에 오늘의 봉급생활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 고용 조건과 보장도 완전해져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성과 중심의 고용에 스스로 자신을 혹사하는 자발적 노예 노동의 시대가 나타났다고 할 것인가? 


삶의 안식이 절실한 시대, 창세기적 인간 시대를 갈망한다. 



과거 ‘근대화 시대’에는 전(前)근대적인 감정적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 ‘이성과 과학’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지배 했습니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자본의 극대화를 부추기자 인간의 욕심이 극에 달해 결국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결국 인류는 ‘탈근대화’(포스트모더니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지만 희망을 주는 신앙의 참된 회개로 돌아가는 데는 관심조차 없어서 ‘절망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탈근대화 선언의 부작용 보다 더 큰 괴물인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등장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한마디로 물신주의의 정점, 맘모니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차원의 노예가 되었고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원리가 윤리가 되었으며, 급기야 절망의 문화를 능가하는 ‘죽음의 문화’ (성 요한바오로2세가 처음 언급)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죽음의 문화, 물신주의, 소비주의와 같은 말들은 서로 연관성이 매우 많고 거의 동일어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기호 신부님께서는 악령과 이 개념들을 동일어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 악령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공동체의 가치관과 세계관, 공동체의 삶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에 대한 박기호 신부님의 묵상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필진정보]
김영범 : 인천교구 숭의성당 사회사목부 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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