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외교부 본관 정문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굴욕 야합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합의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협정이 역사정의와 피해자 인권 회복을 내팽개친 굴욕적인 합의라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와 법적 배상 없이 위안부 문제를 일단락한다는 양국 정부의 결정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광복 70년을 며칠 남기지 않고 열린 이번 회담이 올바르고 조속히 이뤄지길 염원했다. 한일 정부는 지난해 4월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를 진행해왔고, 11차례에 걸쳐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양측은 조금씩 타협점을 찾아 최종 담판을 남겨두고 있었다. 핵심쟁점으로 남아있던 문제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느냐는 것과 일본 측의 사과 방식,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금이나 배상의 성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였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회담 이후 공동기자회견에서 각기 3개 항의 구두 발표문을 내놓았다. 발표에 따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며 아베 총리가 내각총리로서 사과를 표명하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한국 정부가 설립,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금’ 형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의 상호 비난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선언하였다. 윤 장관은 소녀상과 관련하여 “관련 단체와 협의하여 적절히 해결하겠다”며 사실상 철거를 요구한 일본 측의 요구를 수용할 뜻을 밝혔다.
‘강제 동원의 법적 책임’, 핵심쟁점 언급 없어
시민사회단체들은 “피해자들이 수십 년간 요구한 국가적‧법적 사죄와 배상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 문제 제기를 원천 봉쇄해 소녀상마저 철거키로 한 굴욕적 합의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며 “50년 전 3억 엔의 ‘축하금’으로 식민범죄 청산과 법적 배상을 맞바꾼 굴욕적인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에 이어 10억 엔의 ‘출연금’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역사적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기시다 외무상이 대신 발표한 아베 총리의 입장은 오래전 고노 담화를 되풀이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핵심적 쟁점인 위안부 강제 동원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며 “최근 교과서 왜곡 등 식민 지배와 침략역사를 부정하는 국가적, 제도적 움직임이 전면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총리 개인의 추상적 사과는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는 말치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협상에서 해법으로 제시한 위안부 문제 배상에 대해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가해자로서 배상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국 정부가 재단을 설치하고 몇 푼의 기금을 출연하는 방식”이라며 “만일 일본 정부가 진정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법적으로 배상하고 역사 왜곡 중단 등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직접 ‘피해자가 납득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수차례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함량 미달의 입장’에 동의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선언한 한국 정부의 굴욕적 저자세는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치적 쌓기와 한미일 군사동맹 완성을 향한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졸속 야합”이라고 지적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상임대표 문규현 신부, 이하 평통사)은 28일 성명서를 내고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과 피해 배상 외면한 한일 정부의 기만적 야합을 엄중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평통사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역사적 진실로서 일본 정부가 이를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인정해야만 일본의 ‘사죄와 반성’에 진정성이 담길 수 있고, 그때에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에 따른 피해 배상이 아닌 시혜적인 자금 출연을 약속한 것 역시 돈 몇 푼으로 문제를 무마하려는 것으로써 다시 한 번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 쟁점이었던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고 일본 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 이전에 동의함으로써 굴욕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며 “이 같은 기막힌 합의에 더하여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니, 이 문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자제’까지 합의한 것은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에 중대한 걸림돌을 놓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번 한일협정의 배후에 대해 “미국은 한일 양국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봉합을 꾀해왔다. 미·일 양국은 한국 정부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과 한일 물품 및 용역 상호제공협정 체결을 다그치고, 일본군의 한반도 재침략을 위한 구체적 절차를 가속할 것이다”라며 “이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 정치적 야합은 결코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민족과 민중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 “보상과 배상은 분명한 차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 할머니들도 위안부 한일합의 내용에 대해 거부의 뜻을 밝혔다. 이용수 할머니는 협상 결과 발표 후 서울 마포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기자회견에서 “보상은 ‘너희가 돈 벌러 가서 불쌍하니까 조금 준다는 것’이고 배상은 ‘누군가가 죄를 지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일본이 위안부를 만든 책임을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라고 할머니들이 외쳐온 것인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눔의집 이옥선 할머니는 “우리가 제 발로 위안부를 하러 간 것이 아니다. 우리 명예와 인권을 일본이 빼앗아갔다. 끝까지 공식 사죄를 받고 법적 배상을 받겠다”며 정부의 협상 해결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유희남 할머니는 “돈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인간의 권리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