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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붓과 시편 : 天 / 천 / 하늘
  • 김유철
  • 등록 2016-01-05 10:44:53
  • 수정 2016-01-12 10: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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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 천 / 하늘


수도자로 산 적이 있었다. 수도자로 살아가고자 한 적이 있었다. 보이는 하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처럼 여기며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을 곁눈질 없이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하늘은 때로 더운 바람이었고 길고 멀리 흐르는 강물이었으며 기어이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해질녘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모든 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았다. 그제야 내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도자로 살아왔던 것도 알았다. 



하늘



아버지의 다른 말이었을까


하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잎새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바람이 불어도 온 천지 먹구름으로 뒤덮여도 우르릉 쾅쾅 천둥이 몰아쳐도 하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봄볕에 사위가 연초록물이 들어도 붉은 단풍이 나뭇잎 손끝을 시리게 만들어도 아이스크림 같은 눈들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어도 하늘은 하늘로서 있었다 거인의 머리거나 닿을 수 없는 높은 산마루거나 바닷물이 솟아나는 샘 줄기처럼 여겨졌다 하늘은 살아서 갈 수 없는 오지奧地였다 한 번도 뒤에서 안아보지 못한 아버지 등이었다


어머니의 다른 말이었을까


하늘은 오늘도 일렁였다 잎새가 몸을 눕혀야하는 바람을 맞을 양이거나 매화나무에 걸린 매실이 떨어질 비가 쏟아지거나 소리 없는 번개가 스쳐 지나가는 날이 오면 하늘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여름 땡볕에 곡식 기를 땅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거나 사람 욕심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막는 모습이라도 보는 날이 오거나 사람들이 철딱서니처럼 뒤집혀진 세상이 눈앞에 오면 하늘은 아예 물색으로 변했다 옥양목 외씨버선이거나 낙타가 밟고 간 사막이거나 얼룩진 베갯잇처럼 여겨졌다 하늘은 살아서 갈 수 없는 오지奧地였다 여러 번 안고도 알 수 없는 어머니 등이었다


어느 날 하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바로 너다




+ <붓과 시편>을 열며 드리는 시인의 말


천자문에는 봄 춘春이란 글자가 없습니다.

봄은 문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보라는 저자 주홍사의 뜻이 담긴 다빈치코드인지도 모릅니다.

한 주간에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붓과 시편>을 한 편씩 올리면 일 년에 대략 50여 시편이 될 것이고

다 마치려면 2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마치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이어갈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붓과 시편>에서 부디 봄을 만나시길. 두손모음.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시집<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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