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24일 제50회 소통의 날(World Communication Day, 한국은 홍보주일로 번역)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담화문 전문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비의 성년은 소통(커뮤니케이션)과 자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사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살아 있는 육화이신 그리스도에게 일치된 교회는 그 존재와 활동을 확연하게 구별해 주는 자비를 실천하도록 불렸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과 말하는 방식, 모든 단어와 몸짓은 모두를 위한 하느님의 연민‧사랑‧용서를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은 그 본성상 소통이며, 자신을 개방하고 고립되지 않도록 이끕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짓이 거룩한 사랑인 자애에 의해 고무되었다면 우리의 소통은 하느님의 권능을 전해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과 함께 예외없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소통하도록 불렸습니다. 특히 교회의 언어와 행동은 자비를 전달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그리스도님이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모든 이에게 전하기 위해서 오신 삶의 충만을 향하는 여정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도록 자모이신 교회의 열기를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고 우리 주위로 퍼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열기는 신앙의 말씀에 본질을 제공하고 설교와 증언에 생명을 불어넣는 불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소통은 다리를 놓는 힘이 있고 만남과 포용을 촉진하는 힘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를 풍요롭게 합니다. 몰이해를 극복하기 위해, 상처의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평화와 조화를 건설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말과 몸짓을 선별하여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개인 간에, 가족들 사이에, 사회 그룹들 간에, 민족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이나 디지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은 개인과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옭아매며 저주의 메시지를 발하도록 하는 징벌과 응징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야 합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의 말은 친교가 자라나도록 하고, 악에 대해 단호하게 정죄해야 할 때라도 관계와 소통을 결단코 단절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무너진 관계를 치유하는 자비의 힘을 발견하도록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래된 상처와 끓어오른 분노가 어떻게 사람들을 옭아매고 그들의 소통과 화해를 방해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자비는 마치 셰익스피어가 설득력 있게 묘사한 것처럼 말하고 대화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활발하게 하는 능력을 지닙니다. “자비는 의무가 아니다. 땅을 식히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 내린다. 이는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축복하는 곱절의 축복이다.”(베니스 상인, 4막 1장)
정치적 언어와 외교적 언어 역시 희망을 결코 잃지 않는 자비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관해 또는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때, 특히 공적인 책임을 지닌 이들, 정치적인 책임을 지닌 이들 그리고 여론을 형성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항상 주의를 기울이라고 호소합니다. 비슷한 상황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불신‧두려움‧저주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사람들을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용기가 필요하며, 케케묵은 분쟁에 진실 된 해법과 지속적인 평화를 실현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그런 과감성이 필요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7. 9)
저는 우리 소통의 방식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 사목자들의 봉사가 절대 반대자들을 누른 승리의 교만으로 표현되지 않으며, 세속적인 판단에서 실패자나 피해야 할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 모욕을 주지 않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자비는 삶의 역경을 감소시키고 날카로운 판단의 차가움만을 아는 사람들에게 열기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소통의 스타일은 죄인을 의인들로부터 칼같이 도려내는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죄의 상황 - 폭력‧부패‧착취 등 -에 대해 단죄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을 읽으실 수 있기에, 우리는 사람을 단죄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위의 그릇됨과 불의함을 고발하면서, 희생자를 보호하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실수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요한복음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23)라고 우리에게 상기 시켜줍니다. 이 진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자체이시며, 그 온유한 자비는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불의를 단죄하는 방식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사랑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것입니다(에페 4,15 참조). 사랑을 담아 표현한 말 그리고 온유와 자비를 동반한 말만이 우리 죄인들의 마음에까지 도달합니다. 굳어 있거나 혹은 체면치례의 말 또는 몸짓은 우리가 자유를 향한 회개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거부감과 방어심을 자극하여 더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비에 뿌리를 둔 사회적 시각에 대해 대책없는 이상적이고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젖먹이 시절의 가정 안에서 관계의 우리 첫 번째 경험을 되돌아봅시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지닌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체를 사랑하고 귀여워 하셨습니다. 부모님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어하고, 그분들의 사랑은 결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집은 항상 맞아들여지는 곳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저는 모든 이들이 사람들의 사회를 낯선 이들과 경쟁하고 승리하려는 공간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항상 문이 열려져 있고 서로를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집 또는 가정으로 여기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경청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소통한다는 것은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눔은 경청하는 것과 환대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경청하는 것이란 듣는 것보다 훨씬 더 한 것입니다. 듣는 것은 정보의 영역에 관한 것입니다. 대신 경청하는 것은 소통으로 이어지며 ‘가까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경청이란 관람자, 청취자, 소비자의 평안한 상태를 떨치고 나오면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질문과 의혹을 나눌 능력, 곁에서 여정을 함께 걷는 능력,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해방되는 능력을 지녔음을 의미하고 공공의 선익을 위한 봉사에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겸손하게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 더 편합니다. 경청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해하려는‧가치를 부여하려는‧존중하려는‧다른 이의 말을 지켜 주려는 의지를 지녔음을 의미합니다. 경청으로 일종의 순교로, 모세가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행한,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는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자기희생의 태도(출애굽 3,5 참조)를 되풀이 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경청할 줄 아는 것은 굉장한 은총이고 우리가 실천할 은총을 구해야 하는 선물입니다.
e-mail, SNS, 사회관계망, 채팅 등도 인간적인 소통의 온전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소통이 진실한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고 자신의 손에 놓인 기술을 잘 사용하는가 하는 그의 능력입니다. 사회관계망은 관계를 촉진하고 사회의 선익을 증진케 하는 능력들을 지니고 있으나, 또한 개인들과 단체들 사이의 양극화와 분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지닙니다. 디지털 환경은 만남의 장소로, 보듬어 안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광장이며, 유익한 토론이나 도덕적 제제를 가할 수 있는 광장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희년에 “우리가 더 활달한 대화를 나누어 서로를 더욱 잘 알고 이해하게 되길 바랍니다. 이 희년에 모두 닫힌 마음과 서로 무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폭력과 차별을 몰아내기를 바랍니다.”(자비의 얼굴 23) 네트워크에서도 진정한 시민정신을 만듭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하고 있는, 존중해야 마땅할 존엄성을 지닌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을 수반합니다. 건전하고 나눔에 개방된 사회가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네트워크가 잘 사용되어야 합니다.
소통의 현장과 도구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평의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또한 큰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저는 이를 ‘근접성’이라는 말로 정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통과 자비의 만남은 보살피고, 위로하고, 치유하며, 동반하고 축제를 벌이는 근접성이 발생하게 할 만큼 풍요로운 것입니다. 갈라지고, 조각나고, 양극화된 세상에서 자비로이 소통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와 인류의 형제 사이에 좋고 자유로우며 견고한 근접성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6년 1월 24일,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담화 번역문 출처는 오라토리오 나눔(https://www.facebook.com/nanum.kr/)입니다.
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가람비님 안녕하세요, 가톨릭프레스 편집실 입니다. 정확한 지적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실의 실수로 번역문 출처를 빠트리고 기사등록이 되었습니다. 오해받을 수 있는 실수를 빠르게 지적해 주셔서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좀 더 세심하게 노력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nanum.kr/posts/473820926136730:0의 내용을 긁어다가 마치도 자신들이 번역한 양 출처도 밝히지 않고 그대로 올리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