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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언어, 그 신비로운 마법
  • 김혜경
  • 등록 2016-03-04 10:37:12
  • 수정 2016-03-04 15: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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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열 살 무렵이었으니까 초등학교 3,4학년으로 기억된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국어사전이 뭔지, 왜 필요하며 어떻게 찾는지 등을 가르쳐 주셨다. 두툼한 책에 조그맣고 빽빽하게 담겨있는 글자들을 보고는 우리말이 이렇게나 많은가 싶어 무척 놀랐다. 괜히 우쭐해져 기분이 좋기도 했다. 묵직한 두께도 마음에 들었다. 뭔가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사전은 두껍고 무거웠지만 정작 글씨들이 쓰여 있는 종이는 다음 페이지가 비칠 정도로 얇았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찰그랑 소리가 났다. 종이가 아니라 쇠붙이를 아주 얇게 저며 만들었나보다 마음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 처음 ‘가나다순’이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사전에 있는 글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나다순으로 ㄱ,ㄴ,ㄷ,ㄹ과 ㅏ,ㅑ,ㅓ.ㅕ의 꼭 그 순서대로 일사불란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이 수많은 낱말들을 어떻게 다 찾아냈을까, 펼치는 곳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이런 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었다. 떠듬떠듬 모르는 말을 찾아보면 그 옆에는 친절하게도 낱말 뜻이 적혀있었다. 굉장히 재미나고 신기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때부터 심심하면 국어사전에서 낱말을 찾으며 놀곤 했다. 우선 양손으로 사전을 잡고 아무데나 펼친다. 주욱 훑어보다가 마음이 끌리는 낱말 하나를 고른다. 골라낸 낱말의 뜻이 무언지 읽어본다. 그러다보면 그 내용 중에 의미를 모르는 말이 있게 마련, 그러면 다시 그게 무슨 뜻인지 찾아본다. 뜻을 읽다가 모르는 말이 나오면 또 사전을 찾는다. 그런 식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사전을 앞뒤로 뒤적거렸다. 사전의 책장 넘어가는 찰그랑찰그랑 소리가 참 좋았다. 지금도 나는 종이 사전이 좋다.


그렇게 놀다보니 자음과 모음이 어울려 글자를 이루는 우리말을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읽고 소리 냈던 말들이 자음과 모음이 절묘하게 만나서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발음이었던 거다. 또 언어를 이루고 있는 글씨들은 단순히 자모음이 모여서 만들어낸 기호,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나비’같은 글씨를 보거나 떠올리면, 실제로 나비의 부드러운 날갯짓이 느껴지기도 하고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듯도 했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생겨나는 글자들, 글자와 글자가 만나 만들어지는 낱말들, 그리고 낱말들이 이리저리 합쳐지면서 태어나는 길고 짧은 문장들. 굉장히 흥미로웠다. 더구나 같은 낱말이나 문장도 쓰임이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모두가 내게는 신비로운 마술처럼 느껴졌다. 언어에 대한 나의 이런 생각은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강의 「희랍어시간」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보다.


「희랍어시간」은 언어를 잃은 여자와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의 ‘느낌’ 같은 게 만나는 이야기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좀 남다르다. 번잡하고 요란한 말들이 오가는 그런 순간이 아니다. 다만 한 여자가 있다는, 한 남자가 있다는 말없는 기척 혹은 고요한 뒤척임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언어가 태어나기 이전, 사람의 몸이 기억하고 있을 법한 인간의 순전한 아픔과 애틋한 희열들이 서로 만나는 그런 지점이다. 이런 둘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애잔하고 절절한 떨림으로, 긴 여운으로 내게 남아있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단히 민감했다. 그녀는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워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여섯 살 무렵 오빠에게 어렴풋 배운 한글의 구조를 내내 생각하다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라는 것. 그리고 ‘사’와 ‘시’의 ㅅ 역시 서로 다른 소리임을 깨닫는다. 모음 ‘l'와 ’ㅡ'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은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모양이 탑을 닮은 ‘숲’이라는 글자를 좋아하기도 한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숲.”(p.14) 또 회색빛 콘크리트 담장이 길게 펼쳐진 골목인데도 감귤을 생각하면 주황색 감귤이, 나무를 생각하면 나무가 실제로 또렷하게 보이는 경험을 하고는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언어에 예민했던 여자는 자라면서 점점 언어 때문에 괴로워진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낱말들이 꿈틀대며 저절로 낯선 문장을 만들어대고, 밤이면 꼬챙이처럼 뾰족해진 언어가 잠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소스라치곤 한다. 잠이 부족해지고 그럴수록 신경은 더 위태롭게 예민해져 설명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말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혀에서 하얗게 뽑아져 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싶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는 말을 잃게 된다. 


열일곱 살 때 언어를 잃었다가 겨우 회복했던 여자는 이혼하면서 아이를 남편에게 빼앗기는 충격으로 또다시 말을 잃는다. 두 번째로 말을 잃기 직전, “…언어는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p.55-56) 그녀는 그럴수록 더 큰 목소리로, 긴 문어체를 써가며 활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여자는 글을 쓸 수가 없었고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 속에서 일으키는 소란을 견디기 힘들었다. 때로는 한 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의 기미를 느꼈다.


자음모음의 어울림이 만드는 글자들을 그저 신비롭게만 여기던 나에 비해 여자는 언어에 대해 훨씬 영민했다. 사실 피가 흐르는 상처보다 언어가 주는 상처가 더 아플 수 있다. 때로는 너무 깊고 잔인해서 잘 아물지도 않을 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글에 대해, 언어에 대해 이렇게 섬세하고 예리하게 날선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어떻게 소리 내어 말을 하고 글이란 걸 쓸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녀처럼 완전히 언어를 잃고, 언어의 기원 속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몰락시켜야 하리라. 그러고 난 연후 생이 가진 슬픈 연원, 그 여린 몸부림을 천천히 느낄 때에야 비로소, 언어라는 걸 되가질 수 있는 거겠지. 


이 정도는 되어야 무슨 말을 한다든가 무엇인가를 쓴다는 게 가능한 거 아닐까.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고 한 줄 쓸 수 있지 않을까. 말이란 걸 하고, 글을 쓸 만한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마당에, 걸핏하면 별일 아닌 일에도 목청을 높이고 왈왈대는 내가, 어쭙잖게도 이렇게 글을 쓰고 앉았다.



※ '언어, 그 신비로운 마법'은 KCRP에서 발간하는 종교와 평화에 실린 글을 고치고 다듬었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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