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의 사람이 종교인이라지만 폭력적 현실은 지속된다. 종교가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평화를 내세우는 종교인이 도리어 폭력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을 벌였다. 토론회의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 참석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류제동(성공회대 연구교수, 종교학),
박광수(원광대 교수, 종교학),
박일준(감신대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철학),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제정치학),
신익상(성공회대 연구교수, 조직신학, 정리),
오현석(북경대 박사과정, 일본문화),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서양철학/신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북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종교가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이찬수 : 오늘은 종교와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문제입니다. 토론을 위해 학계의 몇 가지 입장을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근대 국민국가는 영토와 국민과 주권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입니다. 권력은 원칙으로는 국민이 제공하고 만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권력은 폭력으로부터 생겨나 정당화되었고, 따라서 권력의 목적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자기유지와 자기 정당성을 위해서 국민을 이용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폭력이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이들에게 정당성을 얻으면서 권력이 되고, 권력이 다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부를 축척합니다. 주로 세금 징수를 통해 그렇게 합니다. 국민은 세금을 내기 싫어도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세금을 냅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세금을 내기도 합니다. 종교도 이러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질 들뢰즈는 토지, 노동, 화폐를 통해서 ‘저장’(stock, 세금을 통해 축적되는 부)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화폐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는 화폐라는 것이 교환이나 상업 등의 수단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세금의 징수로부터 탄생했다고 합니다. 부자가 낼 수 있는 세금과 가난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세금의 비교 가능한 관계를 객관화하기 위해서 화폐가 도입됐다는 겁니다. 토지에서는 땅값이 형성되고, 노동에서는 이윤이 나오고, 화폐에서는 세금이 추출되고 축척되면서 거대한 부가 형성되었고, 그 과정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에서 자본주의도 생겼다고 합니다. 토지와 노동과 화폐가 국가로부터 도망가면서, 즉 화폐가 은행으로 몰리면서 화폐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흐름이 생겼는데, 이것이 사유제라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는데, 자본주의가 특정 영토를 벗어나면서 세계화라는 흐름이 생겼고,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자유 경쟁에 입각해 끝없는 성과를 낳도록 요구하는 흐름입니다. 말이 자유이지, 어쩔 수 없는 자유, 사실상 강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라는 강제에 내몰리고 끝없는 성과를 쌓으라는 요구에 시달리며 피곤해합니다. 몸과 마음이 피로해도 자신이 알아서 나선 모양새다 보니, 딱히 남 탓을 하기도 힘듭니다. 피로의 원인이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바쁘게 일하며 피곤해하는 이를 사회에서는 유능하다며 칭찬합니다. 한병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요구를 감내해내지 못하고 자기주도성을 잃으면 그만큼 좌절도 커지는데, 이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 우울증입니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찾는 것은 대형 종교 시설입니다. 대형 종교 시설에서는 탈진한 영혼을 위로해 줍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나가서 성과를 올리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합니다. 열심히 부를 축적한 것은 하늘의 축복이요 부처님의 은혜로 더 많은 성과를 올린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면서 그로 하여금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사회적 혹은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종교와 경제 구조는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가령 과거 유럽의 경우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영리 추구를 거부까지는 아니지만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반면, 개신교에서는 재물의 축적을 구원과 은총의 증거로 해석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출현에 종교가 공헌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가능한 해석인 듯합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마당에 종교라는 것은 과연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종교는 자본주의의 첨병에 머물고 마는 것일까요. 현상적으로는 그런 분위기가 강력한데, 그래도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요. 고견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종교는 위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 정주진 : 현재의 자본주의 문제를 종교와 관련해 보면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종교가 결국 잘못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 안에 자본주의 문화가 고착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종교 밖에서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저에게 익숙한 교회의 예를 들면, 교회에서건 사회에서건 성공한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그것은 헌금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집단 안에서 인정하고 대우해 줍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인정을 많이 받으려면 돈을 많이 내야 하고 당연히 교회 밖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폐해 등을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도덕성을 자연스레 외면하면서 순응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큰 교회일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다른 종교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 김근수 : 가톨릭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지녔고, 개신교는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한다고 얘기하셨는데, 요즘은 가톨릭도 자본주의에 굴복했습니다. 종교 사회가 신자유주의 피로 사회입니다. 겉으로는 평등을 이야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신분 사회 같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종교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성직자 계층은 평신도 계층과 신분이 다릅니다. 불교와 가톨릭은 진작부터 신분이 뚜렷이 나뉘는 경향이 있었는데, 원래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며 나왔던 개신교도 사실상 새로운 신분 제도가 만들어져서 신도들 사이의 계급 구분을 뚜렷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있어본 적이 없다
- 박일준 : 종교만 조직을 구성하는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이념 또한 자기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확장하려 합니다. 이 때 조직 구성의 차원에서 구조적인 폭력을 말하는 것은 공감이 가지만 현실의 종교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폭력의 경우에는 대안적인 비판이나 생각을 말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종교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자본주의 사이의 대척점들을 잘못 설정하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금 ‘만인사제설’에 대해 언급해 주셨는데, 우리 시각에선 이것이 종교 조직을 해체하는 것이지만 만인사제라는 것 또한 조직입니다.
사실 들뢰즈가 말하는 ‘수목구조’의 조직을 ‘리좀구조’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비판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리좀구조의 관점에서 원자의 눈으로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내용이 수목구조의 관점에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게 됩니다. 폭력과 연관해서 평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은 “종교나 국가가 평화를 실현해 보기는 했는가, 아니, 존재하기는 했는가?”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그것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한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평화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과연 이것이 비판의 문제가 될까요. 원래 이상이란 실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점차 개선되어 나가는 운동이라 할 때, 현재의 교회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에 미치지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 정주진 : 폭력의 문제는 교회가 국가보다 조금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구조적 폭력을 약화시키는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금이 최대한 공공성을 위해서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약자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야 세금을 계속 걷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기본적으로 국가구조가 폭력성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따라 폭력성 정도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반면 교회는 세금을 헌금이라는 형태로 징수합니다. 교회의 헌금은 상당히 강제성이 있어서 공공성과 공동체의 합의가 얼마만큼 담보되어 있고 반영되고 있는지 사실 회의적입니다. 거기에 더해 교회의 감시체계가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의 여부도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국가보다 폭력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평화를 실현해 본 적이 있는가?” 종교인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교회도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종교나 교회가 평화를 선점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평화가 아닌 폭력적인 교회 구조입니다. 이 구조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소수의 작은 교회들 중에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가장 맹점은 교회 구조 안에서 누구도 그런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의 시민처럼 교회의 신도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넘어가는 분위기가 큽니다.
종교와 국가는 서로 공모한다
- 박일준 : 현 박근혜 정부는 시민의 감시체계를 잘 받아서 존중하고 있는가, 또는 정체로서의 민주주의가 이상주의를 올바르게 실현해가는 올바른 제도인가,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뜻이 반영되고 있는가 등등을 물어야 합니다. 자본의 작동을 통해서 운영되는 민주주의는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국가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의 눈으로 그 이면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신익상 : 논의의 방향을 종교와 국가가 자본주의라고 하는 틀 가운데서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에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다룰 개념은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서 정치 세력화한 예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 중 일부도 최근 ‘기독자유당’이라고 하는 정당을 만드는 등 정치화하면서 복음주의를 넘어 근본주의화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추세이기도 한 근본주의 문제를 통해 종교와 국가의 공모 현실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비판 입장에서 논의해 보면 평화에 근접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종교는 권력과의 대결 구도이기도 하다
- 이관표 : 종교사학자들이 이야기 할 때 종교는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자연종교적인 입장에서 계급 질서를 유지하고 삶의 자연법칙을 맞춰가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반대 방향의 종교입니다. 모세로부터 출발 했던 유대적인 종교는 기존의 자연종교에서 계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던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우선하는 흐름을 지닙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그런 예입니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최고의 능력들을 발휘해서 자신이 살 수 있는대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안 되면 도태되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자연법칙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법칙에 반대하며 일어난 것이 개신교입니다. 종교가 국가와 결탁하거나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라 비판하기도 합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 호국적 기독교 이름으로 국난에 참여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도구로서의 기능도 있습니다. 종교에도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종교는 기존에 갖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갖고서, 현실에 타협하는 것을 단절시키려고 하는 하나의 삶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리의 삶이 우리가 보는 그대로만 살지 않고, 자신만 잘 살려고 하는 방식을 흘려보내고, 무언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삶의 혼란들을 제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종교의 출발점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국가와 정 반대의 대결구도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분명히 이야기해야 하고, 종교의 개념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원영상 : 그런데 문제는 ‘종교’라는 말도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종’이라는 말, ‘교’라는 말이 사실 불교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용어입니다. 일본에서 서양의 기독교와 같은 계시종교를 번역하면서 종교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라는 말은 동양의 전통적 관념이 배어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전통에 의해 서양의 종교가 해석된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의 국가와 종교 관계의 분수령이 되는 근대의 정교분리체제가 동양에도 이식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론 동양에서의 종교가 비폭력적 전통만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의 근대국가의 출현은 종교의 폭력성, 정치화, 계급화를 해체하고자 했지만, 도리어 스스로 종교적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종교는 국가의 승인 하에 활동할 수 있는 국가권력의 하부구조로 전락했습니다만,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종교 자신의 역사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末法)세계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현실을 말합니다. 정법시대에는 가르침, 수행, 그리고 깨달음이 있다면, 말법은 이 중에 수행과 깨달음은 없고 오직 가르침이라는 말만이 남아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궁극적인 해탈의 세계를 지향하지 않고 말로만 먹고사는, 그야말로 욕망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불교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언제나 약육강식이었으며, 이러한 세계를 교화하기 위해 불교가 존재하는 것임에도 그 근본 뜻을 저버린 상황을 내다본 것이 말법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종교세계 전체야말로 말법세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놓고 긍정적인 측면을 본다면, 교조(敎祖)들이 그러했듯 종교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발언하고, 그 문제를 고치는데 자신을 불사르며, 인류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와 결탁된 종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가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부구조로 전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공부나 템플스테이와 같은 치유프로그램 개발은 그 자체로도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사회 전체적인 모순에는 눈을 감게 만들고 있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구조적 문제에 대한 종교적인 해법은 없고, 국가의 폭력이나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난 약자들에 대해 위안을 해주는 역할 정도입니다.
종교의 소극적이며 자기 소모적인 대응에 비추어 본다면, 에른스트 슈마허야말로 자본의 논리를 정면으로 파고들어 불교를 그 대안으로 내세운 용기 있는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불교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불교는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는 경제법칙에 가장 적합한 생활을 지향하며, 지구의 자원을 순환 및 지속가능한 상태로 돌보는 생태적인 종교라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직접 남방불교의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토대로 전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의야말로 오늘날 절실한 상황입니다. 비록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창가학회가 시도하고 있는 공명당의 불법민주주의라는 정치참여도 한 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의 정치참여에는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현실 정치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그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한 때도 평화적일 때가 없었던 국가 권력에 종교가 참여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충실하고, 내적인 힘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완화시키면서 사회화 해가는 역할이 병행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으로 봅니다. 유교는 전통적으로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로부터 출발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가르침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사회화의 핵심은 혈구지도(絜矩之道)로서, 자로 물건을 재듯이 내 입장을 생각해서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자세입니다. 결국 자기 성찰을 전제한 종교가 국가 및 자본에 대한 대안적 실천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계속)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 "종교와 국가의 공모"-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