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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3-19 10:43:40
  • 수정 2016-03-19 11: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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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0,4-7)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시편(21)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제2독서(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형제 여러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수난 복음(루카 23,1-49)

<루카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그들은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하자,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께서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해설



제1독서(이사 50,4-7) 해설

<수난하시는 종은 박해자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당신을 내맡기신다>


종에 관한 세 번째 노래인 이 대목은 다른 두 노래와 차이점이 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인물은 분명히 ‘종’이지만(참조. 10절), 그 종이 보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은 제2이사야의 ‘종’에 관한 ‘고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이 대목도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첫 언명(言明)은 ‘제자’로서 예언자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달자로서 전언(傳言: 메시지)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고, 그에게 당신 말씀을 내려, 자기 자신의 말을 아무것도 덧붙임이 없이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예언자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분명히 하셨다.


종에 관한 둘째 노래에서 어렴풋하게 암시된 다른 측면 하나가 셋째 노래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가 폭행을 당한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단순히 예언자가 당하는 몰이해와 박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난이 예언자의 사명에 속하고, 실상 그 자신이 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올바름이 가려질 것을 알면서 “차돌처럼 얼굴빛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수난의 의미는 종에 관한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에 가서야 충분하게 설명할 것이다.

종이 받은 소명의 이 같은 측면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것으로 취하고, 당신 수난에서 재현하셨다(참조. 마르 8,31; 9,31; 10,33이하).


시편(21) 해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서 이 시편도 ‘종’이 받을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되고, 그 인물 안에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수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당신 안에 수렴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백성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의 길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이다.


제2독서(필리 2,6-11) 해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


그리스도교가 옛날부터 불러온 이 찬미가는(아마 바오로가 몸소 쓴 것이리라.) 그리스도께서 이사 52-53에 나오는 수난하는 종과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행구들을 찾아보자. ‘자기 자신을 버렸다.’(7절: 이사 52,12), ‘종의 신분’(7절: 이사 52,13),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다.’(7절: 이사 52,14), ‘죽기까지 순종하시다.’(8절: 이사 53,12), ‘하느님께서 그를 들어 높이셨다.’(9절: 이사 52,13)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돋보인다.


- 여기서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종’이 되라고 소명을 내리신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고 계신 분’, 최종적으로 ‘주님’이라 불리시는 분, 모든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 붙여 드리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가지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종’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사 53,10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하느님 홀로 ‘종’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 없는 분만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죄가 없고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2코린 5,21; 요한 8,46).


마지막으로 10-11절에서 이사 45,23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즉 주님)라는 대명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님’으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심으로써 ‘주 하느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섬기러 오신 ‘주님’이시다(참조. 마르 10,45).


복음(루카 23,1-49) 해설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


당국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싶어 로마 총독에게 당신을 큰 반란범(“백성들에게 소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으로 고발한다. 예수의 활동 전체를 걸어 세 가지로 고발한다. 경제 면에서(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정치 면에서(왕으로 자칭하고), 이념 면에서(혁명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고발을 한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예수께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


당국자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실제 이유가 하나같이 유다인 특권층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특권층이 정치와 경제 면에서 백성을 억누르고 빼앗아 누리고 있던 특권을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뒤흔들어 놓고 계셨다. 그들은 그 모든 불의한 짓을 종교의 탈을 씌워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점을 직접 공격하고 계셨다. 그들이 경제와 정치에서 저지르는 불의한 짓을 숨기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고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와 유다와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던 것이다.


빌라도가 헤로데의 관할권을 존중하기로 함에 따라 빌라도와 헤로데 사이의 불화가 없어진다. 헤로데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겠기에 침묵을 지키신다.


빌라도와 헤로데가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은 빌라도가 갈릴래아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손을 잡는다. 권력자들이란 서로 이익이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적이었다가도 언제라도 서로 합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 자체가 위태로울 때는 모든 권력자들은 기초부터 흔들리면서 서로 협력하게 되어 있다. 


헤로데나 빌라도나 예수 계획이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칠 효과의 범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23,4.14.15.22). 예수의 종교적인 가르침은 유다 당국자들에게나 위험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명한 반란범인 바라빠보다도 훨씬 위험인물임을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에게 ‘반란범’, ‘반역자’, ‘소요를 일으킨 폭도’로 고발당하신다. 군중은 유다 당국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를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라고 청한다.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님께서 사회를 정치․경제․종교 등 모든 면에서 변혁을 일으키려 하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불의한 유다 당국자들은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예수와 당신 계획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중에게 함성을 지르게 한다. 빌라도는 마침내 군중의 함성에 지고 만다. 예수를 반란범으로 사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참된 제자를 상징한다(참조. 루카 9,23).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몸 바치셨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아파할 일이 아니다. 예수의 계획에 등을 돌린 데 따른 결과 앞에서 울어야 한다. 무죄하게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와 함께 두 죄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십자가형은 반란범에게만 내려지던 형벌이다. 이 두 사람도 예수처럼 변혁을 열망했겠지만 예수만큼 근본적인 변혁을 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수들 가운데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백성과 그들의 우두머리들과 병사들이 놀리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를 죽인 책임자들은 용서를 받는다. 자기네 행위의 심각성과 결과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죄명을 써 놓은 명패는 사람들을 자유스럽게 하고 살리는 왕권이 왔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백성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와 하느님의 계획을 비웃는다. 모든 사람을 구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군인들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들은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을 비웃는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시지만 여느 왕과는 아주 다르다. 자기 지배권력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당신 생명을 바치는 왕이시다. 하느님의 나라와 통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예수와 죄 없는 많은 사람의 피를 대가로 요구할 것이다.


모든 것이 망했다 싶은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구원자로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시는 동안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홀로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의한 사회가 단죄한 사람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예수와 당신 계획은 죄수들까지도 갈라놓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를 비웃는다. 예수 방식의 변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란범은 회개하고 예수의 계획을 받아들인다. 정의와 자유와 생명은 지배하는 세력이나 권력에 의하여 실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복음서의 정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는 말씀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의 손에 당신 자신을 넘겨 드리는 행위다. 예수의 죽음은 재력과 권력에 바탕을 둔 체제의 폭력을 불러일으키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는 사람들을 편드신 당신 생애와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 죽음은 또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당신께 순종한 결과다. 그밖에도 예수의 죽음은 진실을 나타낸다. 백성은 뉘우치고 이방인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선포한다. 자기가 속해 있는 체제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사악한 체제임을 인정한다. 군중도 가슴을 치면서 뉘우친다. 예수의 친지들과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서 사태를 낱낱이 지켜본다. 이들이 앞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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