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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영화 속 구약 :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 곽건용 목사
  • 등록 2016-03-21 12:07:57
  • 수정 2016-03-21 12: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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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4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4부는 각각 거짓말하는 신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교회가 하는 거짓말 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언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이웃’은 옆집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자유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계명의 본래 목적은 법정에서의 거짓증언을 금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군주제 이전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법률 전문가가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촌락 장로들이 판사 역할을 했고 모든 자유민들이 배심원이자 증인 역할을 했습니다. 범죄의 목격자 증언이 판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여부를 판단할 때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했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해야 했습니다(신명기 17:6).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이런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서에서 거짓말은 세속적인 범죄(crime)이자 종교적인 죄(sin)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반하는 모든 언행’을 ‘거짓’이라고 규정하고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악마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합니다(요한 8:44).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이 진실해야 하고 거짓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에서 모든 거짓말이 정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각각 자기 아내 사라와 리브가가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창세기 12:11-20; 26:6-11).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에 대해 데릴라에게 거듭 거짓말했고(사사기 16:6-15) 여리고 성의 라합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놓고 왕의 사자들에게 거짓말했습니다(여호수아 2:4-5).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런 라합의 행위를 칭찬합니다(11:31). 믿음의 행위라는 겁니다. 거짓말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얘기는 거짓말이 초래한 비극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열왕기상 21장). 이스라엘 사람 나봇에게는 조상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포도원이 있었는데 아합 왕이 그것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봇을 불러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돈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겁니다. 거저 가지려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나봇은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아합은 불쾌했지만 전통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방 출신 아내 이세벨은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명색이 왕이라면 갖고 싶은 건 뭐든 다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통이 엄연한지라 그녀도 포도원을 억지로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꾀를 내서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쇄로 인봉하고 그것을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 건달 둘을 내세워 나봇이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어 그를 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고 포도원은 아합의 소유가 됐습니다.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이 얘기를 듣고 왕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야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열왕기상 21:19). 나중에 아합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조피아(Zofia)는 바르샤바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나이 많은 교수인데 어느 날 엘즈비에타(Elzbieta)라는 사십 대 폴란드 출신 미국 여인이 그녀 수업에 청강을 신청했습니다. 둘은 구면(舊面)이었습니다. 조피아가 뉴욕에 머물렀을 때 엘즈비에타가 그녀 논문을 번역해준 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바르샤바에 머물며 2차 대전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삶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도덕적 딜레마’였습니다. 한 학생이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과 중병에 걸린 남편, 그리고 남편을 돌보는 의사에 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관한 영화에서 다룬 바로 그 얘기였습니다. 조피아는 학생들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즈비에타가 1943년 2월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섯 살짜리 유대인 소녀를 한 가톨릭교인 부부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이 부모는 게토로 끌려갔고 아이도 같은 길을 갈 운명이었는데 부부가 아이를 보호해주겠다고 해서 데려온 겁니다. 일이 잘 진행되는 듯했는데 막판에 부인이 마음을 바꿔서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아이에게 세례를 줘서 거짓 가톨릭 교인을 만들면 그건 거짓말하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죄를 피하려면 아이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즈비에타가 여섯 살짜리 소녀였고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은 부인은 조피아였습니다. 수업 후에 둘은 지난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엘즈비에타는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고 이후 사십 년 동안 줄곧 조피아 부부에게 버려졌다는 사실 때문에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조피아 역시 그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겁니다. 


이때 조피아는 엘즈비에타를 받아들이지 않은 진짜 이유를 고백합니다. 그것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피아 부부는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게쉬타포가 가짜 유대인 아이를 폴란드인 가정에 보내서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저항 운동가들을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는 겁니다. 엘즈비에타가 가짜일지 모른다고 의심해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그게 거짓소문임이 드러났지만 그땐 모두 그렇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엘즈비에타는 조피아 집에서 잤습니다. 엘즈비에타가 침대 옆에서 무릎 꿇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을 조피아가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 소피아와 엘즈비에타


다음날 둘은 훗날 엘즈비에타를 받아준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는 재단사였는데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번에 그녀를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옛날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녀의 말문을 막고 전쟁얘기는 물론이고 전쟁 후 얘기나 현재 얘기도 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옷을 맞추러 왔으면 그 얘기만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그때 자기는 여섯 살이었다고 말하자 얼떨결에 그는 자기는 그때 스물두 살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깜짝 놀라 다시 옷 얘기로 돌아오지요. 그게 전쟁에 관해 그들이 나눈 얘기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가게를 나옵니다. 밖에는 조피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피아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엘즈비에타에게 “너 어제 밤에 기도했지?”라고 묻습니다. 그녀는 그랬다고 대답하지요. 마지막 장면은 재단사가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내다보는 장면인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거짓말해도 값을 치르지 않는 사회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할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심정은 참담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할까?’라고 묻기보다는 ‘왜 몇몇 사람은 참말을 할까?’라고 묻는 게 더 타당해 보이니 말입니다. 그만큼 참말 하는 사람이 예외인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넘치게 많은데 참말 하는 사람 찾기는 힘듭니다. 참말을 해도 그것이 ‘비현실적’이어서 거짓말로 의심 받는 ‘이상한’ 세상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거짓말을 해도 아무 문제도 없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거짓말이 무소부재(無所不在)인 사회입니다.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사람조차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는데 언론과 종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거엔 신문방송에 보도되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 덕에 정보 얻기가 쉬워졌지만 언론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은 언론이 사실 아닌 보도를 남발한 데 있습니다. 요즘 언론은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앞 다퉈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냅니다. 보도내용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면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일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그린 존, Green Zone>은 분통이 터져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미국정부는 거짓정보를 보수적 신문사에 흘려 보도하게 해놓고 그것을 근거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불의한 정부와 불의한 언론, 둘은 죽이 너무도 잘 맞습니다. 이들에게 사실을 보도하겠다는 의지나 끝내 진실을 밝히겠다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 중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때론 알면서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에도 종류와 등급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모두 똑같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악의 없이 좋은 뜻으로 한 거짓말은 악의적인 거짓말과 구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짓말도 거짓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거짓말이 다 똑같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참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얼마나 나쁜지에 따라서, 그 거짓말이 초래하는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지에 따라서 거짓말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국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빙자한 거짓말 중에 진정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거짓말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에 전체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봐왔으니 말입니다.


왜 우리사회에 거짓말이 이토록 성행할까요?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이 횡행하는 세상을 개탄하는 데 그치지 말고 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만드는 것이 뭔지를 따져봐야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내내 남가주에서만 살았으니 미국 곳곳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형편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사회는 거짓말했을 때 치러야 하는 값이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정치인이나 종교인처럼 말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큰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엔 매우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정치인은 정치생명이, 성직자는 성직생명이 그걸로 끝납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거짓말의 대가가 작습니다. 작아도 너무 작습니다. 웬만한 거짓말은 쉽게 용서되고 잊힙니다. ‘그 정도 거짓말쯤이야……’ 하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값을 치르게 하는 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 다음 편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가 이어집니다.



[필진정보]
곽건용 : LA항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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