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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 포럼 : ‘부활’에 대한 4개의 시선, 참 뜻은? -1부
  • 이찬수
  • 등록 2016-03-24 17:29:02
  • 수정 2016-03-25 16: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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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레페스(REPES) 포럼의 멤버들이 부활절을 맞아 한국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지, 경동교회에 모였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각 4개 종단의 종교인이 모여 부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 종교에서 바라본 부활, 그리고 그것이 가진 참 뜻은 무엇일까? 


토론자는 다음과 같다.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병두 (종교칼럼니스트/ 북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사회 및 진행




- 이찬수 : 지금까지 부활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네 종교의 지성인들이 모인 자리니만큼 부활에 관한 솔직 대담한 토크가 되면 좋겠다. 일단 토론을 위해 기독교 교회 안에서 부활 신앙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간단히 개관할 필요가 있겠다.


기독교는(가톨릭, 개신교 포함)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됐다. 그런데 실제로 평생 교회를 다녀도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9할은 되지 않을까 싶다. 교회 안에서 주입된 언어 말고 부활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부분은 낱말 때문에 예수의 육체적 소생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력하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부활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이 역사를 바꾸는 게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삶을 바꾸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솔직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상황이다. 부활은 허구거나 그들만의 조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대한 반작용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기시만 해서도 곤란하다. 어떻게 조작만으로 세상과 개인이 변하겠는지 이야기하면서 그 근본 의미를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교회는 부활을 신학자만의 언어가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언어, 다양한 영역에 있는 지성적 언어로 종합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다.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김근수 : 부활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설명하는 게 먼저인 것 같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선 적절하지 않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재생한다는 것. 몸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단어를 찾자니 적절한 단어도 없다. 


예수 시대에 있었던 부활 사상은 예수 시대 200년 전부터 생긴 것이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부활에 대해 몰랐다. 당시 이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 당시 죄 없이 죽은 어린이들 즉, 자기 탓 없이 대량 학살된 어린 생명의 죽음에 대한 반성으로 부활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죽음의 문제와 연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부활 사상이 현대에 주는 메시지도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의 내용인즉 이렇다. ‘정의는 불의를 이긴다, 역사의 승자는 선이다’라는 것이다. 즉, 선이 악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조물주는 역사의 희생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희망을 주는 사상이 부활사상이다. 


내 개인적으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역사에서 선의 편에 서는 사람의 삶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느님이 확인한 사건이다. 따라서 부활 사상은 이 시대에도 부활한 사람처럼 사는 것, 지금 선이 악을 이긴다고 믿고 사는 것, 지금은 비록 악이 선을 압도하고 활개 치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고 믿으며 말하고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교리가 아니라 인류가 개발한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단어를 어떤 것으로 하든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믿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부활사상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무교의 사람들도 상식 수준에서 갖고 있는 신념일 것이다. 부활이 낡아빠지고 어려운 주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부활은 오늘날에도 너무 생생한 가치가 있다. 


- 이찬수 : 일반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은데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 김근수 : 전달 과정에서 설명이 생략되었거나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하면 자연과학적으로 가능한가, 꼭 믿어야하는가 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신의 재구성, 죽음 이후부터 생각하니까 마치 ‘부활’하면 임종 순간으로 좁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납득하기 어렵고 찬성하기 어려운, 실생활과 어려운 교리가 되어버렸다. 부활은 인간 삶 전체에 대한 해석이다. 부활을 제대로 해석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할 교리가 될 것이다. 특히 역사 속에서 희생당하는 사람,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마음의 무기가 될 것이다.


- 이찬수 : 일반 신자들이 이러한 정교한 언어까지 구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러한 취지를 소화하면 좋을 텐데 부활을 육체적 소생 정도로 생각하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가 문제인 것 같다. 성서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은 ‘하느님이 그 분을 일으키셨다’하는 문장이다. 예수가 죽음에 허망하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근원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라고 자극하는 힘을 느낀 이들이 그렇게 선포한 것이 최초의 부활 증언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은 단순히 교리화한 명제이기 이전에,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나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신앙고백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 것만 봐도 부활이라는 것은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재탄생, 인간 정신의 재구성, 현실 너머 까지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의 확대다. 



이러한 이야기를 불교나 원불교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지? 기독교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예의상 넘어가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어떤 느낌이 드는지가 궁금하다. 



- 이병두 : 예전에는 ‘말이 되느냐’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가절하 하다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지고 또 여러 책을 읽다 보니까 ‘그래, 뭔가 있을 거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김근수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부활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 원익선 : 이번 대화를 위해 「장신논단」을 보며 부활절의 역사적 기원, 신학적 의미와 메시지에 대해 공부했다. 부활절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공부한 것은 처음이다. 재미있었다. 


지금은 원불교 교무지만, 중학생 때는 교회에 다녔었다. 어린 시절 성탄절 때 느낀 추억이 있어서 성탄절에 대한 느낌은 잘 다가온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성탄절은 있는데, 정신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없을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있었다. 교회를 계속 다니지 못했지만 나중에 공부하면서 교회의 부활절이라는 것이 육체에 국한되지 않고 뭔가 어렸을 때 갈망했던 정신적 세계의 변화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몇 년 전에 본회퍼 자서전을 읽으며 왜 본회퍼는 나치에 도전하는 데 목숨을 걸었을까 궁금했다.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본회퍼가 가지고 있었던 저항 정신이 부활 신앙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이찬수 : 한국의 기독교는 원 교무님이 생각하신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 한국에 서학이 들어오고 자발적인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면서 순교자들이 나왔는데, 순교자들이 갖고 있었던 개념은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본회퍼에게도 그것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정의에 대한 신념이 더 크게 작동하지 않았겠나 싶다. 



원 교무님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부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원익선 : 있는 그대로 느낌을 말씀드리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8상 가운데 수하항마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하항마상은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마왕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의미한다. 원불교도 4월 28일이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를 가진 대각절이다. 종교가 가장 신성시하는 핵심적인 절기들과 부활절은 맞닿는 것 같다. 종교는 평범한 인간을 평범하지 않은 존재로 격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죄가 많지만 죄가 없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처럼, 어떤 종교든 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일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은 모든 종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부활 그 자체는 종교의 보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원불교적인 마인드에서 봐도 그렇다. 


- 이병두 : 그런데 부활을 왜 무조건 믿어야 하는가? 꼭 믿어야 하는가? 


- 김근수 : 부활 교리는 가톨릭에서 반드시 믿어야할 A급 교리에 속한다. 1962~1965년에 전 세계 주교들이 로마에 모여 가톨릭의 중요한 안건을 토의하는 회의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교리가 생겼는데 가톨릭이 가르치는 교리들 사이에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고칠 수 있는 교리가 있고 못 고치는 교리가 있는데 여기서 부활에 관한 교리는 고칠 수 없는 A급 교리에 속했다. 교황이나 마리아, 사제 독신제는 차원이 다른 교리로 분류됐다. 이러한 교리가 생기니까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교리를 현대의 학문 수준에 맞게, 현대의 질문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설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종교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설명해야 한다.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믿으라는 것은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먹으라 하는 것과 같다. 


부활교리는 반복 실험하거나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설명하기가 어느 정도는 어렵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부활은 삶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삶이 옳았는가,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적어도 예수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끝이나 실패가 아니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어울리는 차원에서 마지막 합리성을 발휘하는 순간까지 해설을 하다 보면 부활에 대한 거부감, 부활이 교리 중에서 n분의 1로 축소되는 것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신학자, 목회자, 성직자들이 부활에 대해 끝까지 해설하는 의무가 중요하다. 


- 원익선 : 그것은 역사 속에서 민중의 눈높이에 맞게 다양하게 해설해줘야 한다는 의미인가? 


- 김근수 : 그렇다. 예전에는 부활이 부패하는 인간의 몸이 육체적 죽음 이후에 어느 시점에서 피가 돌고 결합되어 사느냐 하는 쪽으로 해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틀렸다. 그것은 성서에서도 말한 적이 없다. 부활교리는 제대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본뜻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상당 부분 중요한 교리로 다가 설 것이다. 


- 이찬수 : 김근수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부활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연결된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코린토전서를 보면 바울은 육체적 소생으로 부활을 이해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의 시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의 시신이 아닌 영혼이 하느님 편에 계신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그런 식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결국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 부활 신앙의 종점이다. 


그렇다면 부활은 희망의 언어다. 정신적 재탄생의 언어이기도 하고.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언어이기도 하다. 바울도 예수께서 그렇게 하느님 편에 영적인 몸을 입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식의 부활관은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불교의 열반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부활관과 불교나 원불교의 세계관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 김근수 :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제자들이 당시 믿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희망이 없었는데 부활했을 것이라고 믿을 리 없다. 그러니까 희망을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지금 부활한 사람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이 어떻게 소생하느냐의 문제는 다른 영역의 문제이고, 죽기 이전의 삶에서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 이병두 : 김근수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불교 경전에는 늘 선이 언젠가 악을 이긴다고 나와 있는데, 불교경전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완전한 해설서가 될 수 있겠다. 


- 이찬수 :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은 동일한데 이김의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양측의 차이다. 기독교에서 이김의 주체는 신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렇게 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선이기도 하고 영생이기도 하고 정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희망의 하느님이 극복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원래 그래’라고 말한다. 그 원리는 무엇인가,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하는 궁금증이 있다. 


- 이병두 : 근본원인은 불교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니까 답을 안 한다. 


- 원익선 :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위화감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내 나름의 해석을 통해서 듣고 있는데, 불교나 원불교 입장에서 부활을 액면 그대로 보면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생각을 바꿨을 때, 시각이 넓어졌을 때, 오류로부터 바른 곳으로 넘어갈 때를 말한다. 곧 이런 것들이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듭남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에도 여러 가지 층위의 깨달음이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이 변화되었을 때 순간순간 부활을 맛보는 것이다. 


- 이찬수 : 이런 정도라면 부활 이야기를 원불교 교도에게 해도 잘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원익선 : 그렇다. 불교가 선험적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법당에서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이다.


- 김근수 : 나는 원익선 교무님이 기독교적인 언어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부활에 대한 개념을 거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기독교도 이 정도 범위에서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이병두 : 예수님뿐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부활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다면 이점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폭이 아주 넓을 것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이후에도 다른 붓다는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짐승, 산천초목에도 그것은 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범위가 넓어진다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높다.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 ‘부활’에 대한 4개의 시선, 참 뜻은?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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