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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권종상] 부활절, 억눌리고 아픈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 권종상
  • 등록 2016-03-29 10:14:25
  • 수정 2016-03-29 1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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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2주기 행사와 더불어 오는 17일 성당에서 열리는 문성근-장호준 토크 콘서트 포스터를 여기저기 붙이기 위해 동네 마켓과 식당에 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켓 앞에서 부활절을 축하하는 공연을 하고 있는, 어떤 교회의 청년부 혹은 중고등부 소속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이제 나이 서른셋을 넘긴 남자. 죽기엔 아까운 나이. 그에게 인간적인 고뇌란 것은 분명했습니다. 성경에도 그의 고뇌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 잔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정치범으로서 처형 판결을 받고, 온갖 굴욕과 수난을 다 받은 예수가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매달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잔인한 형벌입니다. 자신의 몸무게에 손발이 더 찢어지고, 거기서 흐르는 피로 출혈사하기까지 몸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야 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차라리 참수나 효수가 덜 잔인한 형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대리인인 빌라도와 그 앞잡이 헤로데 정권,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종교계의 기득권자들이 그에게 이런 형벌을 내린 의도는 분명합니다. 기득권자들에게 덤비고, 그들의 통치 방식을 거부하고, 특히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들의 지배 논리를 밝혀 복종에 의문을 갖게 하면 모두 이런 식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의 논리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논리 아래서 저항을 말하고, 불복종을 말하고, 인간이 보편타당하게 공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이야기하다가 죽어갔습니까. 예수께서 말한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이제 나이가 든 저는 의문을 갖습니다. 내 안에 내재해 있는 본능적 욕망들을 ‘죄’라는 굴레에 가둬 놓고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정작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이 가진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특권을 등에 업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심지어는 그들이 죄로 규정해 놓은 것들까지도 마음대로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의 수난이 아직도 십자가 위에서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부활은 때때로 그 위대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예수 부활의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지요. 6월 항쟁 국면에서 박종철과 이한열이라는 두 이름이 그랬듯이, 4월 혁명에서 김주열이라는 이름이 그랬듯이, 5월 항쟁에서 윤상원과 폭도로 몰려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그랬듯이,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부활했던 그 이름들은 곧 예수가 보여줬던 그 부활일 터입니다.


부활절입니다. 


아직도 억눌리고 아픈 이름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과 다른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우리 가슴 속에서 다시 부활하는 ‘꽃’이 될 것입니다. 그 아이들과 희생자 하나하나가 모두 부활할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가슴 속에 부활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역사에서 잊혀 가는 사건과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부활의 기적을 만들 것입니다. 마침내 그 부활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필진정보]
권종상 : 미국 시애틀에서 우체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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