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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주고-받고 또 주고-받고
  • 김혜경
  • 등록 2016-07-11 10:03:15
  • 수정 2016-07-11 12: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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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치는 시간에 기껏 사발면 하나도 먹지 못하고 스러져간 열아홉 김군, 세상에서 아예 등 떠밀려버린 AS기사. 끼니도 거른 채, 고객을 왕처럼 여기며. 그렇게 살아낸 결과가 죽음이라니. “아들더러 가진 거 없어도 책임감 갖고 열심히 살라고, 그러지 말걸 그랬어요…”라며 오열하던 김군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어디서부터일까? 내 어릴 적보다 엄청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네 삶은 편안은커녕 갈수록 더 팍팍하고 고달픈 느낌이다. 왜일까. 


답답한 마음에 펴든 「증여론」. 에밀 뒤르켐의 조카인 마르셀 모스(1872-1950)가 쓴 책이다. 학문적으로는 뒤르켐을 계승하면서도 일평생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모스. 그는 냉혹한 공리주의를 넘어 상호 호혜적인 사회를 꿈꾸며 이를 위해 실천했던 사람이다. 


바타이유,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푸코 같은 유명한 프랑스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증여론」. 그런데 읽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논지를 이어가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여러 자료와 주장들을 동시에 펼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불분명해지기도 한다. 또 각주가 굉장히 많은데다 어떤 건 너무 길어서 몇 페이지에 걸쳐질 때도 있다. 뭣보다 아쉬운 건 번역이다. 번역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가까운 문체. 그러잖아도 모호한 걸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는 다른 가치를 원한다면 인내심을 갖고 읽어봐야 할 책이다.


모스는 ‘개인의 이익 쌓기’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주 당연시 여기는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다. 우리 곁에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어왔음을 제시하면서, 대안적인 삶을 생각하게 한다.

<사회학연보>에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수록된 「증여론」은 특정한 사회에 대해, 단순하게 경험을 나열한 관찰기록을 넘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어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fait social total)”을 밝힌 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모스는 ‘개인의 이익 쌓기’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주 당연시 여기는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다. 우리 곁에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어왔음을 제시하면서, 대안적인 삶을 생각하게 한다. 어쨌거나 본받을만한 삶이 우리 안에 이미 있다는 건 다행이기도 하다. 예컨대 화폐경제는, 개인 사이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물물교환이, 점점 커지면서 화폐가 나왔고, 이게 더 발전해서 오늘날과 같은 신용제도가 생긴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모스는 그런 게 아니란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있었던 경제활동은, ‘신용’을 바탕으로 한 ‘증여’라는 거다. 


그가 주목했던 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물건을 ‘주고-받고-답례’하는 ‘선물’의 사회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선물을 줘야만 하고, 주면 받아야 한다. 받았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한다. 그게 의무다. 또 재화와 부(富), 동산과 부동산 같은 물건뿐 아니라 예의, 여자, 축제, 의식 등 모든 것이 다 교환의 대상이다. 이를 아메리카의 치누크 사람들은 ‘포틀래치’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형태로 행해지는 ‘증여’를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이런 식의 포틀래치를 가능하게 하는 건 ‘하우’다. 뉴질랜드의 마우리족이 쓰는 낱말인 하우는 모든 것에 붙어있는 신화적인 이미지,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준다는 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거다. 또 물건을 받는 건 물건을 주는 이의 본질, 그러니까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게 된다. 


이 영적인 힘은 그것이 태어난 곳, 숲과 부족의 성스러운 장소나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다. 그걸 막으려면 답례를 해야 한다. 하우의 이런 성질이 물건을 순환하게 하는 ‘답례 의무’를 만드는 거다. 만일 답례하지 않으면? 물건을 준 사람에게서 나온 ‘하우’가 주술적 혹은 종교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해진단다. 모스에 의하면, ‘gift’에 ‘선물’과 ‘독(毒)’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선물도 함부로 주고받을 게 아니다. 


또 다른 포틀래치인 남태평양 트로브리안드제도의 ‘쿨라’. 바이구아라는 예쁜 조개껍질 목걸이와 팔찌를 일정한 방향으로 교환하는 포틀래치다. 바이구아는 갖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가 생기며 마음이 가라앉는다”(p.106) 그래서 그 팔찌며 목걸이를 오랫동안 만지기도 하고, 위독한 환자의 이마와 가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걸 교환하는 방향을 바꾼다든지 교환할 상대를 바꾸는 건 안 된다. 너무 오래 갖고 있어도, 너무 빨리 건네줘도 안 된다. 감정이 충만한 바이구아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재화나 장식품, 무기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감정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작용을 한다는 거다. ‘하우’도 ‘쿨라’도 교환되는 물건은 교환을 하는 이와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어서 마치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란다. 




북서부 아메리카의 틀링깃족과 하이다족에게는 ‘누가 더 많이 주나’ 식의 격렬한 포틀래치가 있다. 이곳의 추장들은 정령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자신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재산도 자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야만 부족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다. 재미난 건, 그와 재산이 서로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재산을 소비해서 분배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끽소리 못하도록’ 집과 수천 장의 담요를 몽땅 태우거나 값비싼 동판을 부숴버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명예와 위신을 위해, 더 많이 베푸는 사람이 더 귀족적이기 때문에, 더 많이 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주는 걸 받았다면? 언제나 더 성대한 걸로 답례해야 한다. 추장에게 담요 한 장을 받았다면, 훗날 추장 가족의 결혼식이나 추장 아들이 즉위할 때 두 장을 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체면을 잃거나 최악의 경우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인 형식으로 ‘증여’를 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마나’ 혹은 ‘하우’라 불리는 물건의 영혼이다.


  땅의 ‘하우’가 이렇게 노래한다.

(받는 이에게) 나를 받으세요

(주는 이에게) 나를 주세요

나를 주면 당신은 나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p.225)


  음식의 ‘하우’가 읊는다.

나를 신, 사자(死者)의 영혼, 그의 하인과 손님에게 주지 않으면서

(나를) 마련해 먹는 자는 어리석게도 (따라서) 독을 삼키는 자이다.

나는 그를 먹을 것이다. 나는 그의 죽음이 될 것이다.(p.226)


이렇게 모든 사물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 안다면, 더 많은 부를 위해 재화를 쌓는 게 아주 부끄러운 일이 된다면, 많이 주면 줄수록 권위와 품격이 높아지게 된다면, 주고-받고-답례로 주고-또 받고-또 주는…, 들국화의 노래처럼 ‘돌고 다시 또 도는’ 원리로 재화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옮겨가는 구조의 사회라면, 적어도 김군이나 AS기사처럼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사라지지 않을까.


지금 내가 베풀면 언젠가 더 크게 돌아오리라는 사심 없는 믿음, 그렇게 나누는 게 의무인 포틀래치식 신용사회. 멋지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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