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4개월, 햇수로 40년이었다. 그 40년 세월이 한 순간에 흘렀다. 기나긴 40년 세월도 지나고 나면 한 순간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40년뿐이랴, 80년이든 100년이든 인생 자체가 찰나인 것을….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가 2016년 8월 31일 정년퇴임했다. 40년 교직생활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일련의 행사가 있었다. 29일 저녁에는 전교조 태안군지회에서 송별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9명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30일 저녁에는 과거 태안초등학교에서 같은 학년 담임교사로 근무했던 선배 여교사들이 축하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31일 저녁에는 태안초교 전 직원이 멋지고 풍성한 퇴임식 행사를 열어주었다.
전교조 송별연과 태안초교 퇴임식 행사에 배우자인 나도 참석하여 고마움과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힘껏 안아주었다. 40년을 평교사로 굳세게 달려온 아내에게 축하와 감사와 위로의 뜻을 내 두 팔로 힘껏 표현해주었다.
1975년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77년 5월 보령시 청라면 청소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아내는 공주시 계룡초둥학교에 근무하던 1987년 초 나와 결혼하면서 태안초등학교로 부임했다. 그리고 29년 동안 태안군내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늘 아내의 출퇴근을 도왔다.
아내의 출퇴근을 함께한 세월
첫 아이를 낳고 산후 휴가를 지낸 후에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내가 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뒷자리에 아내를 태워오곤 했다. 아내는 아이에게 젖부터 먹이고 나서 점심을 들고는 또 한 번 아이에게 젖을 물려보고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아내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나는 퇴근 시간에도 학교에 가곤 했다. 아이가 젖을 찾느라 칭얼대기 때문에 아내를 빨리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기도 하다. 당시 아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줄 생각을 왜 못했는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내가 자동차를 갖게 돼서, 오전 중간놀이 시간과 점심시간, 오후 쉬는 시간에도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학교로 가서 엄마 젖을 먹일 수 있었다. 아내는 잠시 후문 밖으로 나와 승합차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려 젖이 잔뜩 불은 유방의 통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니 첫 아이보다 둘째 녀석이 엄마 젖을 더 자주 많이 먹은 셈이다. 갓난아이가 입에 물기 벅찰 정도로 뭉툭했던 엄마 젖꼭지도 첫 아이가 애써 빨아서 길쭉해졌으니 둘째 녀석은 아기 시절부터 누나 덕을 본 셈이다.
1989년 자동차를 갖게 되면서 나는 아내의 운전기사가 됐다. 매일의 출퇴근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출장 때마다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했다.
아내는 2004년 운전면허를 땄다. 1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장롱면허’다. 몇 번 연습을 시켜봤는데, 운전석에 앉으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을 내젓고는, 전속 운전기사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자신이 운전을 한들 차를 두 대 가질 형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운전기사 남편이 사표를 낼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그러니 나는 아내의 운전기사 노릇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30년 가까이 아내와 함께 여러 학교를 출퇴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나도 ‘정년퇴임’을 맞았다. 아내의 운전기사로, 전교조 ‘배후세력’으로 살아온 세월 30년이 ‘찰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아내의 운전기사라는 것과 전교조 배후세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훈장 대상에서 제외된 아내
아내는 훈장을 받지 못했다. 교직생활 40년을 채운 교원에게는 훈장을 준다는데, 아내는 제외되었다고 한다.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39년 4개월, 만 40년에 6개월이 모자란다는 말이 들려서 그런가보다 했다. 기계적인 획일성과 폐쇄성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건 한국 공직사회의 관성이요 특징일 터이니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40년 동안 봉사를 한 것도 아니고 월급 받으며 직업으로 교원생활을 했는데 유독 교원들만 훈장을 받는 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훈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왔다. 기계적인 획일성을 초극하는 현상일 것으로 느껴졌다. 훈장을 주는 사람의 이름이 썩 살갑지는 않지만, 훈장이 어떻게 생겼나 보기나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훈장 수여가 취소됐다는 말이 왔다. 어떤 이유인진 모른다. 훈장 수여 여부는 도교육청도 아니고 교육부에서 직접 관장하는 일이라서 내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섭섭해 하지 않기로 했다.
고맙고 미안하고
아내가 훈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전교조 교사들이, 또 선배 전직 여교사들이, 그리고 태안초교 40여 명 전체 교직원들이 멋진 송별연, 축하연, 퇴임식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마운 마음이다. 전교조 태안군지회 조합원들, 태안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을 올린다.
40년 교직생활을 잘 마친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축하와 감사와 위로의 뜻을 표한다. 생각하면 아내가 너무도 고맙고 또 미안하다.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없는 가난한 삼류 문사인 나는 철저히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아내 덕으로 살아왔는데, 복막투석 환자가 된 지금은 더욱 그러하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생각하면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다. 직장 생활하랴, 시부모 모시고 살림하랴, 실속 없이 바쁜 남편 치다꺼리 하랴, 참 분주하게 살아온 나날이었다. 어린나이에 부모와 생이별한 생질아이들과 또 어린나이에 엄마를 잃은 조카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일도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남편이 누구를 돕는답시고 ‘깨진 독에 물 붓기’를 한 탓에 월급 다 빼앗기며 산 눈물겨운 수년 세월도 있었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빚도 다 갚았으니, 정년퇴임을 하면 부부 함께 외국 여행도 하고 이스라엘과 로마 성지순례도 하리라던 계획도 내가 올해 신장 기능을 잃어 복막투석 환자가 된 탓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또 나는 나대로 아내가 정년퇴임을 하면 아내에게 노친과 집안일을 맡기고 3개월이나 6개월씩 거저 밥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글을 쓰도록 하는 문인마을에 입주하여 제대로 작품 하나 써볼 계획을 가져보았으나, 그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더욱 미안하다. 지금까지 고생을 시킨 것도 과한데, 내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못하고 더욱 고생을 강요하게 됐으니 면구스럽기 한량없다. 아내에게 축하와 감사와 위로의 포옹을 해주면서도 내 가슴 한구석은 절절히 아팠다.
아내는 일찍부터 승진 쪽으로는 마음 두지 않고 평교사의 길을 오롯이 걸어왔다. 승진을 위한 ‘점수’를 쌓는 일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생활 조건을 잘 인지한 탓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정년퇴임을 하는 날까지 아이들과 피부를 맞대며 생활할 수 있었다고 즐거워했다. 마지막으로 담임을 했던 2학년 아이들이 선생님 퇴임 소식에 눈물 흘리고 엉엉 우는 아이도 있더라는 말을 하며 아내는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런 아내는 학급 아이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기 위해 오늘 하루 더 학교에 간다고 한다. 문구점에 물건을 주문하고 어제 배달을 부탁했는데, 문구점 사장이 약속을 어겨 아이들에게 선물 주는 일이 오늘로 미뤄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