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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5-3 : 난민과 환대
  • 이찬수
  • 등록 2016-10-05 12:27:00
  • 수정 2016-10-05 15: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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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하는 제5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 홍정호 박사(연세대, 선교학)가 “난민과 환대”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종교의 평화적 실천에 대한 후속 토론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토론자:

김상덕(영국 에딘버러대 박사과정, 실천신학)

오현석(중국 북경대 박사과정,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조규훈(싱가포르 난양공대 선임연구원, 종교사회학)

홍정호(연세대 객원교수, 선교학/정리)




피해자가 당한 고통의 경로를 추적하다 보면, 가해자, 심지어 테러리스트에게도 상처와 고통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악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 이찬수: 김상덕 선생님은 언론의 사진이 어떻게 평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종교적 언론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일반 언론만 이야기하는 것인지. 언론의 사진이 평화에 기여하는 방식과 사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면 좋겠다.


- 김상덕: 박사학위 논문에서 평화를 주제로 한 일곱 장의 사진을 주로 다루는데, 일반언론과 종교언론의 구분이 모호하다. 예를 들어 광주 항쟁의 진실을 드러내는 사진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진이라는 것은 어느 한 단면을 포착해서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인데, 여러 단면의 진실을 사진이 담보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언론은 진정한 목격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언론인은 사건 당시에 거기에 있었던 이들과 그 사건을 증언하는 이들이 내 놓는 텍스트를 함께 보고,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람이 왜 무고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를 총체적으로 아는 것과 사진을 통해 전달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관찰자의 역할이 다르다.


간혹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들과 가까이 지내다보면 피해자 중심의 편견이 생기는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사진에서 중요한 건 시각적 재현이다. 평화가 만들어지려면 갈등의 현장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갈등의 당사자들과 함께 해야 하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시각적으로 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사진은 하나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지만, 평화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재현해 내는 중요한 평화의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 


▲ 코소보 탈출 ⓒ Carol Guzy (사진출처=퓰리처상 사진전)


- 이찬수: 종교 경전도 전승되던 내용을 어떤 의도로 모아서 편집했느냐에 따라 내용도 달라진다. 아시다시피 저자의 편집 의도를 잘 살피는 신학적 작업을 편집비평이라고 한다. 사진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언론에 게재하느냐에 따라 원래 찍을 때의 의도는 달라질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실제로는 상업적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단순히 언론 게재를 위해 무난한 사진을 선택해 게재했는데, 뜻하지 않게 현실에서는 반향이 클 수도 있다. 사진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면서, 평화적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평화구축에 공헌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럴 때 작가의 의도가 중요한 것인지, 독자의 해석이 중요한 것인지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 언론 사진이 평화 형성에 끼친 영향을 연구한다고 할 때, 독자의 해석이 중요한 것일까 작가의 의도가 중요한 것일까. 결과도 의도와 맞아야만 평화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야...


- 전병술: 폭력을 당하는 사람, 난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가난한 자도 약자도 고통스럽다. 문제는 과연 내가 정말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는가 라는 근본 물음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책임감이 나온다. 평화학의 여러 주장들도 개인의 실천을 불어 일으켜야만 가치가 발현된다. 그런데 실천의 주체는 개인이다. 레비나스는 국가가 완벽한 정의를 구축하더라도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으며, 그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은 결국 개인 혹은 개인의 양심이라고 보았다. 이 말은 종교평화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고통받는 자들을 보면서 내가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왕양명은 공감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 누구에게나 타자의 아픔을 느끼고, 느끼는 순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인 양지(良知)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순간에 실천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편리를 위해서 눈 감느냐에 달려있다. 


- 김상덕: 언론이나 미디어학의 관점에는 세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사진을 만드는 프로듀서의 관점, 사진을 찍히는 대상의 관점, 해석하는 독자의 관점이다. 저의 관심사는 세 번째 관점인데, 독자가 사진을 어떻게 읽고 수용하는가의 문제가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전쟁 사진을 보면 사진이 유포되었는데도 반전운동으로 번지지 않았다. 그 당시 냉전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독자들이 그 사진에 의미 부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이미지를 읽고 평화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평화학은 피해자 중심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 중심적 관점에서 미디어가 재현하는 이미지들을 재해석할 때 평화의 길이 열린다. 


▲ 한국전쟁 ⓒ Max Desfor


- 이찬수: 정의도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평화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가해자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해자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피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때가 많다. 피해자가 당한 고통의 경로를 추적하다 보면 가해자, 심지어 테러리스트에게도 상처와 고통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IS는 주류 언론에 의해 가해자로서의 측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경로를 추적하다보면 거기에도 아픈 피해의 역사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가해와 피해가 생각만큼 이분법적이지 않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이론이 없을까 고민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애당초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종교 혹은 종교적 관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종단으로서의 종교도 상업적 논리를 벗어나기 힘들고, 양적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폭력적 국가의 운영체계나 기업의 방식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들을 종교라고 그러는 것은, 그 깊은 곳에, 지난번에도 나온 말이지만, 질 수밖에 없지만, 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지는 길을 선택하는 그 영성만이 아픔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순수한 동력이 된다. 질 수밖에 없는데도 지는 길을 걷는 이유의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그 속에서 그것을 포섭한 더 깊은 세계가 보인다. 이런 관점이 일반인에게는 어렵고, 사회과학 중심의 평화학자들에게는 관념적이거나 공허하게 들린다. 이론은 가능한데 현실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말, 굳이 말하자면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 가능할지 한계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사유가 이기적인 주체중심의 해석과 의미부여로부터 벗어난다면, 평화라는 단어조차 불필요해지는, 그런 의미의 참다운 평화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본다.



평화라는 단어조차 불필요한 평화


- 이관표: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특별히 종교를 이야기하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일상에서 적용되는 인과율과 목적론의 맹점이다. 우리는 과연 외부에 있는 실재의 인과관계와 목적들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칸트부터 지젝에 이르기까지 이들 사상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은 사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실재 자체를 사유 안에 다 담아낼 수 있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인과적 선후관계와 목적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오해이다. 아니 더 정확히 사태를 보자면, 우리의 사유는 늘 실재에 어긋나며, 오히려 우리의 실재에 대한 오해가 삶 자체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옳다. 


나는 바로 여기에 종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법칙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질서 등을 단호하게 거절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역시 이것과 유사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와서 그가 나에게 환대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존재론적 관점의 전환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들의 경험하는 내용들에 대해 ‘왜?’ ‘목적은?’ ‘가치는?’ 등을 중심으로 묻고 해석해내다가 거기서 다툼과 대립이 발생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깨버리고 나면, 그래서 모든 사유가 이기적인 주체중심의 해석과 의미부여로부터 벗어난다면, 평화라는 단어조차 불필요해지는, 그런 의미의 참다운 평화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한번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허무는 태도나 입장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을 비우면 그 안에서는 종교 간의 관용도 사실상 필요 없다. 왜냐하면 관용은 오히려 무엇인가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하는, 여전히 ‘주체가 무엇인가를 기꺼이 해준다’는 주체중심주의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무아’란 모든 ‘업’을 짊어지는 ‘자아’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자아조차 사라지는 차원을 의미한다. 여기서 각 종교들은 배워야할 것이 있다. 즉, 자기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 내가 없어지는 경험들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가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이다. 


예수 역시 인간이 주체중심으로 평가하는 관점에 포착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의 관점으로 예수를 해석하고 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실패로 끝난 이유는 예수가 그런 인간의 자기중심적 관점에 제한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목적이나 ‘왜’라는 물음을 묻지 않고 묵묵히 살아갔고, 십자가를 졌으며,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었다. 자기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자기를 비워서 남김없이 만드는 과정이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길을 제대로 살아가야 하는 종교인들에게 굳이 평화라는 말은 필요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찬수: 종교를 배경으로 평화에 대해 상상하다 보면, 깊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반영해 내고 사회의 모순도 폭로하고 바로잡으면서 폭력을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레페스포럼이 이러한 작업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


- 이관표: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본다면, 자기를 비우는 길은 곧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패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께서도 세속인들이 주는 썩은 고기를, 어쩌면 병들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여 먹고는 결국 죽었다. 그는 세상에서 보았을 때는 패배한 것이지만, 그렇게 패배함으로써 또한 자신의 드넓은 가르침을 실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평화라는 것도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을, 하지만 그 이면은 인간들의 욕심으로 점철된 그런 법칙들을 깨는 작업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생활에 문제는 있었지만, 미국 기독교윤리학자 존 하워드 요더가 저항하지 말고 패배함으로써 예수의 삶을 따르자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라 말할 수 있다.


- 김상덕: 메노나이트 평화학에서는 이와 관련된 눈부신 업적을 갖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는 실패하지만, 먼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승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 갈등 현장에 있는 이들과 평화 활동가가 만나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야 평화를 위한 협력에 나설 수 있다. 진짜라는 신뢰를 상호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터닝 포인트를 만나 평화를 만드는 일에 기여하게 된다. 


- 전병술: 그러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 이찬수: 구조화된 폭력적 상황에서 개인이 비폭력적 저항을 하는 것은 차라리 가능하고 쉽다. 그런데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작은 폭력을 일종의 수단 차원에서 적절히 허용하고, 상업적 논리나 개인적 욕망도 적절히 이용하면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방법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다. 더 나아가 개인이 철저한 비폭력적 저항도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비폭력적 저항을 하기는 어렵다. 개인은 쉬운데 사람들과 엮여서 하는 작업은 어렵다. 제가 평화도 서로 관점이 달라 사실상 ‘평화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사회과학자들은 이런 부분들을 엮어서 정책과 조약 이야기 중심으로 한다. 물론 이런 작업도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여럿 전체가 비폭력적으로 진행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화‘학’이 평화인가


- 홍정호: 평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전체를 조망하려는 시도야말로 평화학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본다. 사실 평화학이라는 낱말도 좀 낯설다. ‘평화’와 ‘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게 아닌가? 평화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근대적 의미의 ‘학’이라는 체계 안에 담길 수 있나? 서양 근대에 있어서의 ‘학’이란 결국 ‘과학’ 혹은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사유의 체계화일 텐데, 평화에 관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반(反)평화적 태도가 아닌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평화학은 소통을 위해 불가피하게 ‘학’이라는 틀을 사용하지만, 인문학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탈근대적 맥락에서 ‘학’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전개되어야 한다고 본다. ‘평화’가 ‘학’이라니, 대화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자기 혼자 1시간을 떠드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평화는 차라리 ‘학’이 아니라 ‘도’와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노자를 읽다가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는 구절을 새겨두었다. ‘학’이 날로 더하는 것이라면 ‘도’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둘이 맞물려 있는 것이겠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하라고 한다면, 평화는 더하는 ‘학’ 보다는 덜어내는 ‘도’의 실천에 더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평화학 자체도 ‘도’를 붙잡고 가는 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포럼에서처럼 ‘종교평화학’이라고 명명할 때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혹은 평화학이란 이미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전철후: 공감한다. 저도 원불교 교무이자 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참된 ‘道’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원불교에서는 누구나 어느 장소에서든지 선심(禪心)을 통해서 도를 닦아 나가는 무시선(無時禪)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道라고 하는 것이 추상적이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제거 하라’는 행위라고 강령처럼 말하고 있다. 실천적 종교인의 자세와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학문을 준비하라’ 하면서 지식과 학문의 배움을 통해서도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불교가 가지고 있는 병행과 병진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지금 시대에 요구되는 종교인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결국 깊은 영성의 도심(道心)에 바탕한 학문이라야 정신문명을 이끌어 나갈 수 있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 김상덕: 근대까지는 종교가 가장 위에 있었고, 종교가 진리나 질서 체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갈등의 주체가 되어왔다. 근대로 넘어가면서 갈등의 주체인 종교는 빠지고 좀 더 객관적인 사회과학적인 학문이 들어 왔다. 그러면서도 종교가 여전히 현실 속에서 중요하고 그 안에 무언가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의식을 한다. 평화학이라 했을 때 요한 갈퉁 이전에는 분석적인 평화학의 경향성이 짙었다. 이것이 갈등해결학이다. 갈퉁 이후의 제2의 평화학은 라운드 테이블이다. 그래서 평화학에서 종교도 이제 대화 토론의 참여자가 되었다.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테이블 위에서 종교는 한 토론자일 뿐이다. 다른 학문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종교의 위치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평화‘학’이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의 주제파악,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주제파악이 늘 선행되어야 한다.



평화‘학’도 나쁘지만은 않다


- 이관표 : 어떤 보편적인 일반화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보편화와 개별화라는 모순의 공존을 자신의 삶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때는 모으고 일반화하려는 본능으로 가다가, 또 그 시절이 지나면 해체하고 버리려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어떤 ‘학’이라고 하는, 보편적이고 일반화시키려는 의도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절대화될 때 죄로 변할 수 있으며, 이것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일반화가 언제든지 깨질 수 있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통찰, 즉 자기주제파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 모습을 잊지 않는다면 사실 ‘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대신 그 ‘학’이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의 주제파악,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주제파악이 늘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향해 가지만 이와 동시에 늘 개별화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오현석: 어떤 대화이든 당사자가 대화의 테이블에 나왔다는 것은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 되면 대화의 내용이나 진행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절반 이상은, 아니 거의 성공한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종교든 평화든 당사자들이 대화의 테이블에 나올 생각이 전혀 없다는 데 있다. 대화의 테이블에 나오게 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교육해야 하고 더불어 교육의 내용의 확산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요즘에는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작년 가을 북경대학에 서울대 미학과에서 가르치셨던 오병남 선생님이 오신 적이 있다. ‘인문학의 위상’에 관한 강의 중에 그분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한동안 대학에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한다고 난리였는데, 한 두 학기 인성교육해서 인간이 되면 그 자(者)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평화교육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인성교육이든 종교교육이든 평화교육이든 그 핵심은 ‘역지사지’의 훈련을 하는 일이다. 이것이 단기간의 교육으로 가능하겠는가? 인생의 전 기간을 통과하며 체험으로 얻어지는 고갱이가 바로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물론 쉼 없는 수련이 있다면 그 기간은 훨씬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가정과 학교에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다. ‘한 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모든 사람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홍정호 박사님도 실패를 통해 나아간다는 얘기를 하셨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가능성을 늘 고민하게 된다. 



(테러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성공한 근대 국가’가 되지 못하고 ‘봉건적 국가’로 남아 있거나 ‘실패한 국가’가 되어 국민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 하기 때문이다.



국가도 대화의 파트너다


- 조규훈: 오늘 토론에서 국가와 종교 간의 관계라는 맥락이 우리에게 긴급한 주제로 나타난다고 본다. 지금 종교의 대안적 청사진이 요구된다는 것은, 근대 시대에 주요한 사회적 주체로 나타났던 ‘민족’이나 ‘국가’라는 단위의 효용성이 한계를 드러내는 상황과 관련된다. 이러한 역사적 변환은 종교의 대안적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늘 다룬 여러 내용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어떻게 사회적 혹은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 할 수 있는지가 저한테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른바 ‘국제관계’란 ‘상호 경쟁하는 국가들’을 기본적인 틀로 삼는다. 오늘의 대화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그런 체제에 기반한 사회적 삶의 방식이 지구환경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침식시키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류가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인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는 척결의 대상이기 보다는 ‘라운드 테이블의 주요 파트너’로서 그 가치가 여전히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나타나는 중동지역의 분쟁이나 ISIS 등 종교와 관련된 테러가 발생하는 배경에는 국가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즉, 이러한 현상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성공한 근대 국가’가 되지 못하고 ‘봉건적 국가’로 남아 있거나 ‘실패한 국가’가 되어 국민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근대 국가는 그 한계성을 노정하면서 가능성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가 지속가능성을 침식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증진시킬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를 종교 측에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근대 국가가 기반해 있는 ‘주권’ 개념의 재구성에 종교들이 기여할 수 있다. ‘진아’나 ‘무아’ 같은 불교의 ‘자아(self)’ 개념을 사회적 또는 국가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권’ 개념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할 수 있다. 국가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절대 주권’의 틀을 넘어 ‘타협하고 조정 할 수 있는 주권’, ‘양보할 수 있는 주권’이란 개념의 확산을 통해 국가의 선기능은 살리면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종교들이 내놓을 수 있다. 레페스포럼이 갖는 중요성은 이렇게 종교가 제공하는 개념들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오가면서, ‘사회적 평화를 깨뜨리는 악’과 대안과 관련된 담론을 이끌어 내는 것에 있다.


- 이찬수: 그렇다면 다음에는 IS 문제를 가지고 이 분야 전문가와 함께 국가, 폭력, 종교 등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자.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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