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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 일꾼, 하느님께 돌아가다 -1
  • 최진
  • 등록 2016-11-07 18:30:37
  • 수정 2016-11-07 18: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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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민낯을 드러내며 민주화의 불을 지핀 백남기 선생이 열사들의 땅에 묻혔다. 고인은 떠나는 그 순간까지 가는 곳마다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민주화의 불씨를 심었다. 


‘생명과 평화 일꾼 故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으로 이름 붙은 고인의 공식 장례일정은 5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권의 시신 탈환 시도를 무너트리고 41일간 머물던 장례식장을 나온 백남기 선생의 시신은 모질게 식어버린 서울 명동성당에 첫 불씨를 지폈다. 


▲ 지난 5일, 정권의 시신 탈환 시도를 무너트리고 41일간 머물던 장례식장을 나온 백남기 선생의 시신은 모질게 식어버린 서울 명동성당에 첫 불씨를 지폈다. ⓒ 최진


명동성당은 350여 일간 길 위에서 매일미사로 봉헌되던 고인의 추모미사를 장례미사로 봉헌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고인은 1974년 교내에서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해 수배가 내려졌을 때 명동성당으로 피신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세례명을 받았다. 백남기 선생을 ‘임마누엘 형제’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그 동안 백남기 선생에 대한 국가폭력 사건에 침묵했던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도 이날 장례미사에서 만큼은 주례를 맡았다. 수차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백남기 선생의 병실과 빈소를 찾았던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가 강론을, 서울대교구 유경촌 주교가 장례예식을 맡았다.


김희중 대주교,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의 목소리를 들으라”


김희중 대주교는 “고인은 한 생을 생명과 평화의 일꾼으로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갔다”며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갈망하던 고인의 모습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라는 말로 강론을 시작했다. 


김 대주교는 “우리는 행복한 삶을 묻기 전에 삶의 이유와 죽음의 방법을 물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묻지 않고 그 가치를 잊은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잊은 사회다”라며 “이번 장례미사는 슬픔으로 채워지는 일반적인 사별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슬픔보다 분노가 더 큰 아픔으로 채워지는 이별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임마누엘 형제가 누워있어야 할 자리는 절대적인 침묵의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농민들과 함께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할 들녘”이라며 “정당한 대가를 바라던 고인의 외침이 살수 대포에 참혹하게 죽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요구였나”라고 개탄했다.


▲ 김희중 대주교는 “백남기 형제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최진


이어 “국민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국가가 부당하게 공권력을 사용해 국민을 죽이고도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가 없는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정부는 물속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을 어떻게 해보지도 못한 부모들, 취업난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이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외치는 노동자들과 농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백남기 형제가 우리 곁을 떠났다기보다, 이 땅의 민주화와 농촌에 무관심했던 우리가 백남기 형제를 떠밀어 보낸 것”이라며 “백남기 형제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미사가 끝난 후 백남기 선생의 장녀 백도라지 씨는 “아버지는 살아생전 명동성당에서 임마누엘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장례미사를 이곳에서 치르게 돼,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명동성당도 고인의 장례미사를 통해 ‘민주화의 성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국가폭력 범행장소에 서서 시민들은 똑똑히 기억했다


▲ ⓒ 최진


▲ 많은 시민들이 백남기 선생이 떠나는 길을 뒤따랐다. ⓒ 최진


장례미사 후 명동성당에서 종로 르미에르 빌딩 앞까지 추모행렬이 시작됐다. 백남기 선생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와 유가족들 뒤로 시민들이 뒤따랐다. 거리의 시민들이 행렬에 동참하면서 행렬 규모는 더욱 길어졌다.


350여 일 전, 고인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장소에서 첫 노제가 시작됐다. 노제는 상여가 장지로 가는 도중 거리에서 지내는 제사다. 가해자가 사과를 거부하는 현실 속에서 노제의 추모사와 퍼포먼스는 원통함과 분노가 담겼다. 백남기 선생의 차녀 백민주화 씨는 끝내 아버지가 쓰러지신 장소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 끝내 백민주화 씨는 백남기 선생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장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 최진


시민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국가폭력 범행 장소에서 벌어지는 노제를 지켜봤다. 노제를 통해 고인의 상여에는 종과 장미꽃이 올려졌다. 고인의 죽음은 현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며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며 정의와 정당함을 부르짖던 외침이 붉은 장미꽃에 담겼다.


범행 현장에서의 첫 노제 후, 오후 2시부터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야3당 대표를 비롯해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현 정부를 규탄하는 각종 시위가 함께 열리면서, 이날은 광화문 광장 전체가 현 정부를 꾸짖는 상황이 됐다.


어느 곳에서나 백남기 선생 그림과 ‘박근혜 퇴진’, ‘하야하라 박근혜’, ‘이게 나라냐’, ‘새누리도 공범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이 보였다. 또한 대통령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포괄적 뇌물죄, 기밀누설, 직권남용죄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구속영장 손피켓을 든 사람들도 있었다.


▲ 백남기 선생이 지피고 간 불씨는 곳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최진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대표와 정의당 심상정 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저마다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특검이 도입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찰이 이날 시민들에게 또 다시 물대포를 겨누고자 했던 사실을 폭로하며 백남기 선생의 죽음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행위임을 되새겼다. 


투쟁 의지 다지면서도, 마지막 말은 “아빠 사랑해요”


백도라지 씨는 “아버지가 쓰러진 지 거의 1년이고 돌아가신 지 40일이 넘었다. 이제는 영원한 안식을 위해 마음이 아파도 보내 드리겠다”며 “아버지를 끝까지 지켜준 시민들에 대한 감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백 씨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검 운운하면서 아버지 시신을 빼앗겠다던 경찰들이 오늘 아버지가 가시는 길 지켜주니 아이러니하다”라며 “이 정권의 수명도 끝인 것 같으니 이제 경찰은 대통령 말고 국민에 충성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에겐 여러 숙제가 남았다”라며 “정치권에서 약속한 대로 꼭 특검이 실시돼 강신명 이하 살인 경찰들이 모두 법의 심판을 받길 바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의사로서 지침이나 의료 윤리를 헌신짝처럼 버린 서울대병원에 대해서도 책임을 꼭 묻겠다”고 밝혔다.


▲ 백도라지 씨는 특검을 통해 책임자 처벌을 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로 유족 인사를 끝마쳤다. ⓒ 최진


또한 “아버지가 시위에 나왔다 물대포를 맞고 결국 돌아가신 이유는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쌀값과 어려워지는 농촌 현실 때문”이라며 “아버지를 위해 마음 보내준 것처럼 농촌과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백 씨는 “아빠 사랑해요”라며 유족인사를 마쳤다. 숱한 정치적, 사회적 부조리함과 투쟁의 의지를 다지면서도 아버지를 보내는 마지막 말은 이별을 슬퍼하는 가족의 아픔이었다. 


백남기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민주사회로 나아가자는 이날 영결식의 취지는 이후 진행된 촛불집회로 드러났다. 유가족과 농민회를 태운 버스가 전남 보성으로 출발할 당시 광화문 광장은 계속해서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거리마다 광장으로 향하는 시민행렬이 줄을 이었다. 백남기 선생이 지핀 민주화의 불꽃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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