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영결식을 마치고 유가족과 가톨릭농민회를 태운 버스는 3대로 나뉘어 전남 보성으로 향했다. 1호 차에는 유가족이, 2호 차와 3호 차에는 가톨릭농민회와 백남기투쟁본부 회원들이 장례위원으로 탑승했다. 농민회가 탑승한 2호 버스에서는 그동안 익숙했던 ‘백남기 형제’, ‘백남기 농민’ 대신 ‘남기 형’, ‘우리 남기’라는 생소한 호칭이 나왔다.
오후 4시 30분경 서울을 빠져나왔던 버스는 오후 6시 30분이 돼서야 목적지의 중간 지점인 정안 휴게소에 도착했다. 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차에 올라 보성 장례식장을 향했지만, 8시에 도착하기로 예정됐던 보성 장례식장은 오후 10시가 넘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이 지났지만, 보성 주민들은 1년여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백남기 선생을 위해 장례식장 입구부터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먼저 고인의 시신을 장례식장 안치실로 옮겼다. 백남기 선생의 부인 박경숙 씨는 동네 주민들의 위로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했다.
이후 장례식장 1층에서는 ‘고 백남기 농민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 역시 1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 ‘우리 남기’를 환영하는 마음과 국가폭력에 죽임을 당한 애환이 함께 했다.
선생과 30년 지기인 두 명의 동생이 추도사를 맡았다. 최영추 씨는 “아직도 남기 형님이 ‘막걸리 한잔 하자’며 마루로 부를 것 같다”고 말했고, 김창화 씨는 “남기 형님은 나의 동지이자 사랑하는 선배였고 동생이었고 스승이었고 형제였다. 사나이 중에 정말 참된 사나이였다”고 회상했다.
‘남기 형님’을 기리기 위해 웅치면을 우리밀 본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과 추모 재단 운영방식 제안 등이 나왔지만, 현실성을 따지기보다는 ‘남기 형님’을 어떤 식으로라도 더 기억하고 싶은 간절함이 앞섰다.
남아있는 농민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자 ‘씻김 굿’도 진행됐다. 고인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고려해 ‘보살’과 ‘극락왕생’ 같은 단어는 ‘예수님’과 ‘천국’ 등 가톨릭 용어로 바꾸었다. 무속인은 굿을 하면서 묶여있는 끈을 풀고, 배를 띄우며 고인을 보내기 위한 상징적인 예식을 진행했다. 마지막 길까지 농민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의인 따라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워야”
6일 오전 9시 웅치면 생가 방문을 시작으로 백남기 선생의 마지막 고향길 여정이 시작됐다. 살아생전 생명을 가꾸던 밀밭을 둘러보고 마을 입구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두 번째 노제를 올렸다. 이후 보성역 앞 광장에 들러 추모제를 치르고 보성역에서부터 읍사무소를 거쳐 군청까지 1km 거리를 행진했다. 마을주민 300여 명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이후 광주 금남로에서 마지막 노제가 열렸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불씨를 건넨 의인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기 위해 금남로에는 6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며 백남기 선생의 정신을 이어 또 하나의 의인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노제를 마치고 시민들은 금남로에서 서방시장까지 행진을 시작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까지 동참하면서 행진 규모는 더욱 커졌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김명섭 신부는 “생명을 위한 삶을 살다가 불의한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인의 삶은 예수님과 닮았다”며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기억하며 국가폭력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불의한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보성성당 주임 시절 백남기 선생이 항상 조용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냈다고 회상했다.
고인의 시신은 오후 3시께 광주 영락공원에 위치한 승화원에서 화장됐다. 빈소에서는 가톨릭농민회와 신자들이 연도를 했고, 승화원 앞마당에서는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이영선 신부와 부산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김인한 신부가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고인은 오후 5시께 한 줌의 재가 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인의 유골은 민족민주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광주 북구 망월동 5·18구묘역에 안장됐다. 그렇게 백남기 선생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며 생명을 바친 동료들 곁으로 돌아갔다. 하관식에 참석한 이들은 백남기 선생이 마지막 민주열사가 되길 염원하며 고인이 바라는 세상을 마음에 새겼다.
생명을 가꾸고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는 고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땅으로 돌아가 묻혔다. 유골함 위로 흙이 쌓이니 땅과 어울려 하나가 됐다. 불의에 저항하며 하느님을 증거 했던 생명의 일꾼은 그렇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