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기원(祈願)의 실체라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체감하고 살았다. 내 고장(충남 태안)에 전기가 들어온 1960년대 중반 이전, 그러니까 등잔불이나 남폿불을 켜고 살던 시절에도 촛불은 각별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새벽에 깨어 일어나 기도를 할 때는 등잔불을 끄고 촛불을 켜곤 했다. 대낮에 기도를 할 때도 초에 불을 붙이곤 했다.
양초는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었다. 기도를 할 때만 사용했고, 평상시에는 창호지에 싸서 각별히 보관하곤 했다.
태안성당이 본당이 아닌 공소(公所)이던 시절, 공소를 지키는 노(老) 복사님은 신자들끼리 기도를 하는 ‘공소예절’ 때는 촛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산 본당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거행할 때만 제대의 초에 불을 붙이곤 했다. 그만큼 양초는 아껴야 하는 사물이었고, 촛불은 신비로운 기원의 실체였다.
촛불, 기원의 실체
나는 요즘도 촛불을 손에 들 때는 어렸을 적 우리 집의 누추한 방을 밝히던 촛불과 그 촛불 앞에 앉아서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또 태안 공소에 서산 본당의 신부님이 오실 때만 제대에 촛불이 켜지곤 했던 기억도 떠올리곤 한다. 그런 기억의 점화로 말미암아 내 손에 들린 촛불은 좀 더 명확한 기원의 실체가 되어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2010년부터 자주 손에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촛불의 파도를 보도 매체들을 통해 접하곤 했지만 내 손에 직접 촛불을 들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을 때도, 또 이명박 정권의 미국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장대한 촛불의 파도가 국민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지만, 나는 매번 촛불을 들지 못했다.
촛불을 들지 못하는 것만큼 자괴감이 컸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에 행동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매번 숟가락만 들고 서 있는 형국에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가 환갑을 지나 노년에 접어든 시절부터 직접 촛불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2010년 가을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생명평화미사’가 열렸다. 월요일은 천주교 사제들의 휴무일이었다. 천주교 사제들은 휴무일인 월요일 저녁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4대강의 신음과 비명을 전하며 미사를 지내곤 했다.
나는 매주 월요일 태안에서 서울 여의도를 왕래하곤 했다. 여의도에 갈 적마다 손에 촛불을 들고 파괴되어 가는 4대강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2012년 7월부터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촛불을 들곤 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미사도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불법과 부정이 노정된 이후로는 불법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천주교 각 교구와 수도회의 시국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하며 촛불을 들곤 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로는 매주 수요일과 월요일 광화문광장을 다니며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촛불을 들곤 했다.
나는 여의도에서, 또 대한문과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때마다 오늘의 촛불은 ‘밑불’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늘은 촛불의 규모가 작지만, 이 작은 규모의 촛불들이 쌓이고 쌓여서, 또 모이고 모여서 언젠가는 장대한 파노라마로 변하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예감이기도 했고 예상이기도 했다. 아니, 기원이었다. 간절하고도 명확한 기원이었다.
작은 밑불들이 모여 장대한 불꽃을 이루었다
나는 그런 기원을 안고 매주 월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 가서 촛불을 들곤 했지만 2016년 6월 이후로는 그 행동을 접어야 했다.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장의 기능을 잃어 매일매일 복막투석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된 탓이었다.
내가 광화문광장에 가서 촛불을 드는 행동을 접고 있는 동안 그 작은 규모의 촛불들은 거대한 밑불로 승화되었다. 수백만 개의 촛불로 점화되어 매주 토요일 밤을 뜨겁게 달구곤 한다.
촛불은 기원이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함성이다. 정의와 평화의 실체다. 세상의 모든 눈(眼)들이 내뿜고 있는 광채다. 그 안광(眼光)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비추며 나아간다.
거대한 촛불의 파노라마를 구경만 하기는 너무도 면구스러워 지난달 12일 제3차 촛불집회 때는 참가하려고 전교조 태안군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내 건강 문제 때문에 아내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 건강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교사들이 만류를 했다. 태안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했다가 서울에서 집회를 마치고 밤 9시 이후에 출발한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19일의 제4차 촛불집회를 또 집에서 지켜보자니 다시 면구스러움이 커졌다. 건강 문제를 핑계대고 행동을 유보한다는 건 정말 마음 편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26일의 제5차 촛불집회 때는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병원의 복막투석실 간호사에게 문의하여 밤 0시쯤에 투석을 실시해도 괜찮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2016년 11월 26일 제5차 촛불집회 때는 광화문광장에 가서 민주주의의 촛불이 될 수 있었다. 아내도 함께 했고, 동생 부부도 동참해주었다. 130만 개 촛불들 속에서 나도 한 점 촛불로 타오를 수 있는 기쁨, 그 감격은 실로 컸다.
밤늦게 돌아오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갈 길이 멀어 밤 9시쯤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 행진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아쉬움이 컸지만, 실로 뿌듯한 마음이었다. 또다시 서울 광화문에 가서 촛불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차례만이라도 광화문광장의 촛불이 될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나는 변함없이 아니 더욱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민주주의의 촛불이 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