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꼭 35년 후인 2015년 5월 18일 저녁 7시, 서울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은 200여 석의 좌석이 모두 찼다. 우리 시대의 광대이자 소리꾼인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오월 광주’를 듣기 위해서다.
‘오월 광주’가 서울에서 공연되기는 25년 만이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 왔기 때문인지 서울 관객들은 일찍부터 공연장에 와서 서성거렸고, 주인공 임진택은 그들 사이를 느긋하게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5· 18 광주항쟁이 35년 됐는데 역사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세월호를 겪고서도 갈수록 경각심이 없어지고 있잖아. 진짜 우리 사회는 이제 생명사회, 안전사회, 민주사회, 평등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더 이상 나이 먹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이번 서울 공연을 하게 됐어.”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90년, 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한 벗 윤상원을 그리며 쓰고 작창을 했다고 그가 밝힌 이 작품은, 그 동안 광주에서는 수차례 공연했지만 서울에서는 1990년 초연 이후 25년만이란다.
그는 그 이유를 ‘더 이상 나이 먹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광주항쟁이 있은 지 35년, 그 동안 세상은 참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될, 반드시 쟁취해야만 할 역사적 대의와 인간적 결단의 참모습을 기리기 위해, 다시 한 번 판소리로 5월의 광주를, 그것도 서울에서 노래한다고 했다.
1950년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마당극과 판소리에 홀딱 빠져 40년을 연극과 마당극, 판소리뿐만 아니라 영화배우, 시나리오 작가, 축제 기획자 겸 총감독, 정치판 정치연출가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며 치열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오직 한 길 창작 판소리에만 집중하겠다는 결심이자 의욕을 그는 그렇게 에둘러 말했다.
1970년대 민족·민중예술의 한 획을 긋는 마당극을 주도한 연출가이자 문화운동가인 그는 1975년부터 5년간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인 서편제 보성소리 정권진 명창께 소리를 배웠다. 1985년부터 본격적인 광대의 길로 나서 김지하의 담시를 바탕으로 한 창작판소리 ‘똥바다’를 만들어 국내는 물론이고 서독과 미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공연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가 ‘이번에는 서울에서’라며 다시 꺼내든 이 작품은 5· 18 광주항쟁 열흘간을 기록영화처럼 관객들 앞에 펼쳐 놓는다. 첫 아니리(판소리에서 광대가 말로 줄거리를 엮어나가는 사설) ‘이 때는 어느 땐고’로 시작해서 마지막 날 ‘계엄군이 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까지 긴박 처절한 이야기가 펼쳐진 후, 노래 ‘산 자여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를 부르며 끝난다.
1980년 신년 벽두 과도정부의 움직임은 세마치 장단으로, 학생들이 모여드는 장면은 자진모리로, 계엄포고 장면은 설렁제로, 공수특전대원들 장갑차는 엇모리 장단으로, 아들 시신을 붙잡고 울부짖는 노모의 모습은 중중모리 장단으로 자유자재로 변화하면서 고수와 맞춘다.
그와 30년 호흡을 맞춘 고수 이규호는 북 장단으로 학생들을, 시민들을, 계엄군을, 탱크를, 통곡하는 노모의 모습을 그 감정 그대로, 그 움직임 그대로 소리에 얹어 놓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대목을 연습하면서 몇 번이나 통곡했어. 그것은 결연히 죽음을 택한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만, 그들이 남기고자 한 역사적 대의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채 학살자와 그 아류들이 득세하고 있는 기막힌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
‘오월 광주’는 판소리가 젊은이들에게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충분히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잘 증명해 준다. 우선 ‘창’하면 얼른 떠오르는 왠지 알아듣기 힘든 대사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린다. 전통 창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이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더 쉽다. 내용도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임진택은 시작하기 전 관중들에게 무대가 보통 판소리 무대하고는 달라 이상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가만히 보니 그랬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대 뒤 벽면에 크게 걸린 걸개 그림이다. 판소리 공연에는 대개 병풍을 치는데, 이 작품에서는 첫 공연 당시 민중미술 화가들이 그려준 ‘도청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시민군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내걸었다.
다음은 광대와 고수의 차림새다. 여느 판소리 공연에서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지만 현대식 개량 한복을 입었다. 30살 때 겪은, 지금의 이야기여서 그랬다는 것이 광대의 설명이다. 또 있다. 음악회처럼 무대에 보면대가 있다. 거기에 대본을 놓고, 가끔 본다.
오랜만의 공연이라 아니리 사설이 헷갈려서 그렇다며, ‘보면대’를 ‘보면 된다’라고 풀이한다. 실제로 공연 도중 가끔 보면대를 봤는데, 그것이 오히려 공연의 흐름을 조절해 관객과의 일치감을 더욱 높였다. 마지막은 관객 참여에 관한 것이다.
슬픈 내용이지만 추임새가 빠질 수 없다며, 얼씨구, 좋다, 잘한다. 아먼, 그라지, 어~이 등 전라도 사투리 추임새를 알려준다. 그러면서 경상도에는 판소리가 없지만, 추임새 하나는 끝내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직인다’라는 사투리란다. 그러자 관중석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께 ‘직인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월 광주’는 자연스럽게 망국적인 지역 경계를 넘어섰다.
90분가량의 ‘오월 광주’를 듣다보면, 5· 18 광주민중항쟁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면서 음악이나 연극, 오페라 등 다른 장르로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공연장을 나오면서 ‘아하, 창작 판소리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뒤늦은 감탄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해 임진택의 말을 직접 좀 더 들어보자.
첫째, 판소리는 기록이며 증언이다. 판소리는 한낱 의미 없는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시대 민중의 생활과 투쟁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사실로서의 이야기’여야 한다. ‘오월 광주’는 잔인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광주 민중의 무장항쟁과 짧고 굵었던 해방기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장엄한 기록이며 절절한 증언이다.
둘째, 판소리는 통곡이며 절규이다. ‘오월 광주’는 억울하게 죽임당한 수많은 민주영령들의 통곡이며,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자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절규이다.
셋째, 판소리는 그림이며 영화이다. 판소리는 ‘보면서 듣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다시 ‘들으면서 보는’ 예술양식이다. 관중은 광대의 소리가 빚어내는 어떤 정황, 어떤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려 보는’ 것이다. ‘오월 광주’는 소리로 빚어내는 그림이며 영화이다.
그는 앞으로 더 나이 먹기 전에 창작판소리에 매진할 계획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백범 서거일인 6월 26일에,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인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아베를 쏘다’라는 새로운 창작판소리를 각각 공연할 예정이다.
이들 작품들이 ‘오월 광주’를 공연하면서 그가 다시 정립한 판소리의 본질적인 면들을 어떻게 얼마나 잘 구현할지 주목된다.
‘오월 광주’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해서 “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관객들 모두 일어나 오른손 주먹을 굳게 쥐고 함께 부르면서 끝난다. 광대가 무대 한 가운데 처연히 서서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모두 일어나 같은 포즈로 함께 노래한다.
90분을 열창한 광대는 목이 쉬었지만 여전히 결연히 노래하고, 북은 제 스스로 소리를 내는 듯 그냥 마냥 흘러간다. 가끔씩 추임새를 넣으며 달구어진 관객들은 그러나 갑자기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어 정적 그 자체를 연출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막이 내린다. 박수소리가 이어지는데, 조용한 박수다. 관객들은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 나간다. 그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입을 열고 감상을 나누느라 공연장 주변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진다.
백기완 선생은 여는 말씀에서 광주 오월항쟁 35주년을 맞아 갖가지 행사가 있었지만, 역사적 예술적 두 불길이 하나가 되어 타오르는 불꽃이 바로 이 곳이며, 임진택은 그야말로 소리꾼이라고 소개했다.
함세웅 신부는 닫는 말씀에서 이 모임은 임진택 명창이 판소리로 펼쳐 보인 80년 5월 광주에서의 열흘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그 얼을 이어받아 오늘 이 땅에 아름다운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임진택은 창작판소리 말고 꼭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6월 10일 발족하는 민주주의국민행동에서 함세웅 신부를 상임대표로 모시고 자신도 공동대표의 일인으로 책임을 맡기로 약속하였다.
“민주화운동을 해온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권력에 들어가고 출세를 하기도 했지. 그들은 이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싸움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공간에 휩쓸려 있는 거지.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을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권력 맛을 보지 않은 사람, 출세하지 않은 사람이 필요해.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서게 된 거야”
30년, 40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 그는 이제 몇 안 남은 희귀한 ‘천연 기념물’이 된 것이다.
그도 정치판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그것도 대선 관련해 3번씩이나 말이다. 그가 뛰어든 것은 늘 민주 민중진영이 위기에 처해있던 때였다.
첫 번째가 백기완 민중후보. 1987년 양 김 선생이 둘 다 출마를 고집함으로써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민중의 힘으로 민주진영 후보단일화를 이루자고 나섰으나, 선거결과는 민주진영의 충격적인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두 번째가 문국현 후보. 이명박이 여론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그를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비정치권의 문국현을 내세웠으나 정동영과의 단일화가 무산되고 선거 결과는 역시 참패로 끝났다.
세 번째가 손학규 후보. 본선에서 박근혜를 이기려면 진보와 중도를 아우를 수 있는 손학규 후보가 민주당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자원해서 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손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밀림으로써 일찌감치 패배하고 말았다.
정치판에서 늘 패배하는 쪽에만 있었다면, 뭔가 판단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오해받는 것이 나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 나는 힘 있는 사람 쪽에 줄 선 것이 아니야. 내가 백기완 선생이 대통령 되리라고 생각하고 그 일에 나섰겠는가? 양 김 선생 단일화를 강제하기 위해서 판을 흔들려고 했던 거지.
내가 문국현씨를 대통령후보로 선택했던 시점은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이 1%도 안 나올 때였어. 그리고 손학규 선배는 나하고는 정말 절친한 관계인데, 손 선배가 한나라당일 때는 나서서 도와줄 수도 없었지. 나는 박근혜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손 선배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선 건데, 젠장 민주당 안에서는 한나라당 멍에 때문에 손학규가 후보될 가능성이 더 없는 거야.
하여간 나는 대선 관련해서 3번이나 나섰는데, 나는 힘 있는 후보, 될만 한 후보에게 가서 줄 선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또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갔던 거라고. 나는 패배가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으려 했고, 대의명분으로도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렸던 거라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소. 나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던 때나, 노무현 형이 대통령 되던 때나, 박원순 후배가 서울시장이 될 때 선거운동에 나선 적이 없소. 그 흔한 문화예술인 홍보대사 무리에도 끼지 않았소.
왜냐하면 거기는 나 아니라도 서로 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줄을 섰거든. 당선 가능성이 높은데, 더 유명한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 날 원하지도 않고, 내가 나설 필요도 없거든.”
정치 이야기 끝에 김지하 시인에 대해 물었다. 그와 김 시인은 대학 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로, 그는 김 시인의 작품을 많이 무대에 올렸다. 연극으로 또는 판소리로. 김 시인과 요새는 어떻게 지내세요, 안 만나나요? 라는 질문에, 그는 안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못 만나는데, 한 10년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 시인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생명사상 같은 기본 생각에 대해서는 지금도 동의하고 옳다고 본다고 했다. 하지만, 발언이 때로 착란적이고, 불쑥 드러나는 어떤 행동이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당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시인이 너무 생각이 많아서, 너무 세상을 꿰뚫어보고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연장 밖으로 나온 그에게 몇몇 팬들이 너무 젊어 보여 못 알아보겠다며 덕담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 공연이 90분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좀 힘들었다고 진지하게 답했다. 공연을 일 년에 12번은 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일 년에 한 번 밖에 못하니 녹이 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올해 혼자서 완창을 해야 하는데, 3시간짜리라며 걱정했다.
“내가 필생의 작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 창작판소리 ‘녹두장군’이야. 내가 태어난 곳이 거기고. 한다한다 해놓고는 30년이나 붙들고 있는 셈이지.” 그래서일까, 종교를 묻자 서슴없이 ‘동학’이라고 답했다. ‘사람이 한울’이라는 말에 꽂혀서 그렇단다. 그러면서 지금의 천도교와는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뒤풀이 장소로 떠나면서 그는 부채, 걸개 그림, 대본, 보면대 등 각종 물품을 그의 크지 않은 승용차에 가득 실었다. 겨우 운전석만 남을 정도였다. “판소리는 연극과 달라. 연극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스탶들이 챙겨주지만, 판소리는 혼자 다 챙겨야 하거든”
그가 혼자 하는, 혼자 할 수 밖에 없는 ‘창작 판소리’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찾아올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