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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7-1 : 폭력은 왜 구조화하는가
  • 이찬수
  • 등록 2017-02-02 14:39:58
  • 수정 2017-02-24 17: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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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하는 제7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 이찬수 교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종교평화학)가 “왜 폭력은 구조화하는가: 종교심보다 앞서는 모방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내용의 요약이다. 이를 통해 종교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 상상해본다.



참석자:

원영상(원광대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홍정호(연세대 객원교수, 선교신학/정리)



모방하는 인간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은 ‘모방하는 인간’(Homo Mimeticus)이다. 모방의 근간은 타인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어떤 ‘모델’(매개자)을 보면서, 과히 배고프지 않은데도 그 식당에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거나, 실제로 가게 만드는 동력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도 자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닌, 자본의 소유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형성되고 증폭된다. 지라르에 의하면,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매개자가 있다. 욕망은 늘 매개적 욕망이다. 


매개적 욕망이 중첩되어 형성되는 흐름에는 반드시 거기서 주변부 혹은 소수자가 있게 마련이다. 역으로 중심 세력 안에 있는 이들은 매개적 욕망의 시스템에 적응하며 소수자를 생산하는 폭력을 은폐하는 데 자기도 모르게 공헌한다. 지라르가 말하듯이, “개인적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모든 적응의 기원에는 어떤 불법적인 폭력의 은폐가 있다. 적응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이 은폐를 실현하는 자이거나, 아니면 문화질서가 이미 이 은폐를 행했을 때에는 그것에 순응할 줄 아는 자이다. 부적응자는 순응하지 못한다” 이른바 적응자들이 은폐해온 폭력의 구조가 사회적 소수자를 낳는다는 말이다.


▲ (사진출처=EBS다큐프라임 영상 갈무리)


모방하다 원수가 된다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한 문제는 매개의 종류다. 지라르는 매개를 ‘외적 매개’(médiation externe)와 ‘내적 매개’(médiation interne)로 구분한다. 외적 매개는 매개자가 추종자 밖에 있는데다가 자신보다 월등하다고 인정되는 매개이기에, 그 매개와 관련해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이 적다. 그 매개자를 따라하려 들 뿐이다. 유명 연예인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명 연예인 ‘코스프레’하기가 그 예다. 기독교인이 예수를 매개로 그 너머를 모방하려는 경우가 외적 매개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내적 매개는 욕망의 주체와 정신적 거리가 서로 접근해있는 매개를 말한다. 욕망의 주체가 자신도 욕망의 대상처럼 될 수 있다고 확신할 때의 그 매개다. 이 때 욕망의 매개자는 욕망의 주체에게 경쟁자가 된다. 매개자도 다른 매개자를 통해 경쟁자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럴수록 피차간에 욕망은 확대된다. 욕망은 전염성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적으로 매개자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델이자 장애물(model-obstacle)이 되고, 당겼다가 밀어내는(attraction-repulsion) 관계에 놓인다. 그러면서 대립과 갈등은 확대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거리 혹은 차이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는 착각 속에 놓인다.


지라르에 의하면, 매개자를 통한 모방은 ‘거울 뉴런’(mirror neuron) 구조를 하며, 서로 ‘짝패’(double)가 된다. 서로 간의 모방적 경쟁 구도는 상대방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추동하며, 모방의 주체는 상대방의 욕망을 소유해 자기 존재를 상승시키려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다 싶어지면 매개자를 깎아 내린다. 매개자의 초월성을 지상으로 끌어 내림으로써 자신을 상승시키려 시도하지만, 애당초 욕망의 주체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매개자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매개자에 집착할수록 욕망의 주체는 매개자에게서 드러나는 욕망을 완전히 자기화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기 존재의 위기를 겪는다. 거울 속의 자신을 주먹으로 치다가 자신의 손을 다치듯이, 급기야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것은 거울처럼 ‘짝패’의 형태로 나타나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서로 닮은 한 쌍의 원수들만 남는다. 그러나 서로 ‘르상티망’(원한)을 축적해 스스로를 파괴할 때까지 이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매개자에 대한 주체의 숭배는 아주 은밀해서 주체도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전쟁이 서로를 파괴시키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경쟁적으로 싸워대는 것과 비슷하다. 



모방하다가 스캔들을 일으킨다


지라르는 상대방의 소유를 자기도 소유하기 위해 상대방을 모방하려는 욕망이 일상화하면서 제도나 문화가 발생되었다고 본다. 제도나 문화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모방욕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 겹치면서 더 경쟁적으로 바뀌고, 모방적 경쟁관계가 갈등을 불러일으키다가 폭력도 벌어진다. 폭력의 주도자는 모방 자체다. 모방적 경쟁 관계가 심해지면서 서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급기야 살생마저 벌어진다. 


하지만 경쟁 관계에서의 승리가 주는 강렬함 때문에 모방 경쟁은 지속된다. 경쟁 대상과 경쟁하면 할수록, 대립하며 상대방과 차별화하면 할수록, 이들은 서로 비슷한 존재가 되어간다. 욕설을 주고받다가 주먹질로 가듯이, ‘나쁜 상호성’이 폭력적 열기를 상승시키고, 대립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스캔들)이 된다. 부정 모방의 극단에서 상극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로 모방한다지만, 이 상호성은 단순히 양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본대로 양자 사이에는 욕망과 모방을 정당한 것인 양 충동하는 매개자가 있다. 매개자는 상이해도, 욕망의 주체가 그 매개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는 매일반이다. 나아가 욕망의 구도가 복잡해질수록 모방의 대상도 복잡해진다.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추동하는 매개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매개 자체도 복잡해진다. 저마다 매개자의 우월성을 모방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상승시키려 한다. 자기 존재를 상승시키는 그 매개자는 마치 신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런 욕망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면서 집단의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스캔들)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캔들’은 부딪쳤다가 쉽게 피할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기묘한 장애물이다. 스캔들은 우리를 물리칠 수 없도록 우리를 더 끌어당긴다. 우리는 이전에 그 스캔들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을수록 더 열정적으로 다시 그 스캔들에 빠져들어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이 현상의 기초에 모방적 경쟁자의 행동이 있는 것이다. 


희생양을 만든다


이 스캔들(걸림돌)이 집단화하고, 집단 전체의 문제가 되던 즈음, 이 집단적 걸림돌을 해소시키는 방식으로 인류가 취해온 방식이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역병, 기근, 침략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될 때,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 제물을 바쳤다. 그 제물을 ‘파르마코스’(pharmakos)라고 한다. 테베 사람들에게 번진 페스트에 대한 책임을 지고 희생된 오이디푸스는 전형적인 희생제물이다. 


이 희생제물은 단순히 개인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피를 좋아하는 특정인에게 바쳐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폭력의 방향을 하나의 대상으로 돌려 공동체 전체를 상호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문화적 장치다. 예수 시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는 회의에서 했던 말은 이러한 문화적 장치를 잘 보여 준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요한복음 11,50)



이 때 희생물로는 대체로 희생제의를 찬성하는 세력에 대해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선택된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적인 인물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주변인 혹은 경계인은 주류에서 밀려나 있기에 복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아감벤이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원용하며 권력의 속성을 설명할 때의 그 ‘호모 사케르’도 일종의 경계인이라 할 수 있다. 스피박이 그람시의 입장을 빌려 말하는 ‘서발턴’(subaltern)도 구조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부류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남부의 조직화되지 않은 시골 농민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서발턴’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서발턴은 사회적 구성원이라는 정치적 자의식이 없기에 국가의 지배적인 사상 체계, 지배력에 영향 받기 쉬운 부류이자,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거나 헤게모니로의 접근을 부인당한 그룹이다. 스피박은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인 등 인도의 소외층, 특히 억압받는 여성들의 사례에 집중하면서, 폭력적 구조 한복판에 있지만 그 구조를 폭로할 수 없는 이들(서발턴)의 의미를 끝없이 드러낸다. 서발턴의 의사가 주류 사회에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를 지속적으로 폭로한다. 그렇게 폭로하는 작업이 말할 수 없는 서발턴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자, 서발턴에게서 말을 듣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발턴은 주변부가 중심 질서의 모순에 대한 강력한 폭로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실 어려운 언어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서울의 전철 입구 계단에 동전바구니 앞에 놓고 아무런 표정 없이 무력하게 앉아있거나 자고 있는 허름한 걸인 혹은 노숙자는 돈 한 푼 달라고 적극 구걸하지도 않는다. 사회적 모순을 말로 폭로하지도 않으며, 사실상 그럴 의지도 없다. 행인들도 그냥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이런 사람, 이런 현상은 예외적인 어떤 것이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실상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상의 일상사다. 주류가 배제하고 법이 보호하지 않는 예외는 일상의 이면이며 증언자다. 


주변부로 밀어낸다


▲ ⓒ 이찬수


마찬가지의 논리로 이른바 ‘소수자’라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저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사실상 다수자, 즉 주류의 실상의 증언자다. 소수자의 실상은 다수자의 실상의 속살이다. 폭력적 구조를 은폐하거나 그 질서에 순응하면서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럴수록 주류 사이의 빈틈도 드러난다. 그 틈이 희생양 시스템의 본질이다. 소수자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다수자에 대한 ‘양적’ 개념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수자의 실상을 증언하는 ‘질적’ 개념인 것이다. 


물론 소수자를 의도적으로 소수자로 몰아가는 주체를 특정할 수도 없고, 특정인이 이들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류 중심으로 짜인 구조가 이들을 몰아낸다. 이른바 ‘질서’라는 것이 주류 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때 질서는 필연적으로 법 및 법의 운용 체계로서의 정치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법은 아래로부터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여 종합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위로부터 만들어져 아래에 던져진 일방적 규칙에 가깝다. 이 규칙에 동의하거나 적응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법은 주류를 정당화한다. 이 흐름은 규칙에 맞지 않은 행위나 사람을 사회적 무질서로 간주한다. 위로부터 규정된 질서, 법, 정치의 체계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 중심에서 벗어나는 소수자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중심 혹은 주류는 소수자의 문제를 가능한 한 개인 탓으로 돌리며 외면한다. 그것이 개인 탓이라는 판단 속에 이미 중심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은 ‘중심’ 중심의 언어다. 무언가 중심 ‘밖’에 있다는 사실은 중심의 자기중심성을 증언한다. 길거리의 무력한 걸인은 자본중심주의의 속살에 대해 자발적으로는 증언할 수 없는 근원적 증언자인 것이다.


중심 혹은 주류는 소수자를 주변으로 밀어내며 존재한다. 희생양 시스템도 그렇게 밀려난 이들이 당하는 희생을 정당화시키면서 성립된다. 왕따 문제, 난민 문제,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문제 등도 모두 희생양의 조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모두들 바로 그들 때문에 사회가 시끄럽고 불결해진다고 간주되는 존재들이다. 


중심지향의 세력이 이들을 포함해 여러 측면의 소수자들을 소수자로 남겨놓으면서 소수자 현상은 지속되고, 예외여야 할 것이 일상이 된다. 이런 식으로 희생양 시스템은, 설령 내용은 복잡다단해졌을지언정, 비슷한 구도로 진행되고 있는 여전한 현실이다. 


문제는 종교인이 전 인구의 절반이 넘지만 이런 현상을 지속되거나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종교가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지는 상황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종교와 폭력 혹은 평화 관련 토론을 했으면 한다.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폭력적 현실 속에 있는 종교가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평화를 내세우는 종교인이 도리어 폭력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을 벌였다. 모임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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