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신자유주의 시대 교회 안의 악령
  • 편집국
  • 등록 2015-05-26 11:32:18

기사수정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던 무자비한 과거(탈출 32, 1-35)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돈이라는 우상으로, 참된 인간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로 나타납니다.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는 그 경제적 불균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신의 필요 중 하나를 충족시키려는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필요란 바로 더 많은 소비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 55항).


자유주의 경제는 1970년대 동유럽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의 19세기 고전 경제학자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 에 근거한 ‘정부가 개인의 권리와 사적재산권을 보호’하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대변하며 등장하였다. 


F. A. 하이에크는 그의 저서 『노예의 길』에서 2차 대전 당시 독일 등을 중심으로 번져간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의 흐름을 보면서 자생적인 발전의 동력을 집단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인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자유의 원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진보는 경쟁을 극대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국가도 이러한 경쟁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말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경쟁보다 더 열등한 방법들이 경쟁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경쟁이 대개의 경우 알려진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권력의 강제적이고도 자의적인 간섭 없이도 우리의 행위들이 서로 조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경쟁을 우월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경쟁사회의 피로


경쟁을 통한 진보는 개인의 성과와 생산성은 높일 수 있지만, 그만큼 불평등은 심화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이들이 많이 발생하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양산된다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로 인해 소득불평등이 완화 될 것이라는 견해들이 무색하게 경제는 성장했지만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왔다. 


대기업 삼성이 수 조원의 영업이익을 낸다 해도 삼성반도체에서 직업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산재판정도 받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내 몰리고 노동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낙수효과가 아니라 낙수에 맞아 죽은 사람이 늘어만 가는 구조의 불평등을 설명할 뿐이다.


낙수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수 이론은 자유경쟁 시장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성 정책과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옹호하는 행태들에 대해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소외된 이들은 여전히 낙수를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혹은 이기적 목표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 54항).


2010년 대기업 총수가 제 회사 직원들 앞에서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노동자를 한 대에 100만원씩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때렸다. 그 노동자는 자기 트럭을 가진 사업자이지만 실재로 ‘특수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기업총수는 노동자의 탱크로리와 매값으로 7000만원을 지급했지만 며칠 후 7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업의 총수가 자기 아들이 매 맞은 것에 대한 복수로, 사람을 시켜 폭행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자본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군사독재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 의심스러울 뿐이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갑질도 ‘유전집유 무전구속’이라는 말로 정리되었다. 정치적 악행에는 국민들이 강력히 저항하는데 경제적 악행에는 특별한 저항이 없다. 그저 불매운동 정도가 전부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왜 정치적 의식과 더불어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일까? 


돈을 말하면 뭔가 상당히 ‘세속적’이라 몰아가지만,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음흉한 속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보여 지는 자동차는 검소해 보이는데 그 안에 실린 골프채는 수 천 만원짜리라는 것을 신자들은 알고 있을까?




교회로 스며드는 자본


1997년 구제금융사태이후 자본이 국가(정부)를 누르고 주인이 되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냈어야 했다. 우리는 현대, 삼성, SK 대기업을 욕하면서 그러한 대기업에 우리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애를 쓰고, 누군가 집안에서 그런 대기업에 다닌다 하면 이것은 아주 자랑스럽고 부러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하는 것이다. 부당한 노동과 임금으로 고통 받고, 해직과 실직으로, 청년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의 많은 노동인력들이 있는데, 그 문제의 책임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경쟁에서 뒤진 그들 개인 각자에게 돌아간다. 


스팩을 쌓지 못하고, 외국어 시험을 준비하지 못한 그들의 문제로 몰아간다. 피로한 사회는 스스로 자신을 탓하고 책망하게 만든다.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보기 보다는 각자가 경쟁에서 도태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무한 경쟁 사회의 논리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느님을 만난다. 하지만 예수가 살았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고,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채, 성전만을 보고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교회가 날이 가면 갈수록 돈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교회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버렸다. 돈이 우상이 되었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라!’ 가르치셨는데 교회 성직자들은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의 백성들과는 무관하게 대형병원, 실버타운, 대학인수, 무리한 개발과 건축을 전방위적으로 펼쳐나간다. 


시중에 금리가 인하되면서 돈들도 안전한 피난처를 찾기 시작하였다. 자본 앞에 닥쳐온 시련 중에 자본은 교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동산과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온갖 세금 혜택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자를 고스란히 안겨주니 교회만큼 안전한 피난처가 어디 있으랴? 


원금보장에 이자수입이 안정적인 교회 안으로 돈들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대규모 기획 투자 (PF. Project Financing)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악령이다. 이것은 교회에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넘쳐흘러 들어오고 있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돈이 또 다른 신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개인적 정화와 사회구조의 정화가 꼭 필요하다. 각 개인의 정화도 중요하지만 나약한 인간본성을 보완하고 대체할 사회 구조적인 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잘못된 사회구조, 정책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사회구조를 변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은 그 흐름 자체가 모두 구조변혁을 위한 서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무제한적인 경쟁과 자본의 새로운 변신 가운데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 1986』 에서 “인류가 경험한 초유의 풍요가 도리어 인간의 일상적 인식능력과 통제수준을 삼켜버릴 정도로 재앙의 근원이 되었고, 자유주의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사실상의 강제의 결과가 되어 버렸다” 고 말한다. 


경쟁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실패와 좌절도 많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고, 지친 마음을 ‘힐링’ 하려고 한다. 그런 곳에 사람이 몰리고 무조건적 성공, 무지갯빛 미래를 말하는 책과 강연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던 시간이 있었다. 차모 신부의 ‘무지개 **’는 이제 그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성공하고 모두가 생각한 대로 부유해 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판매한 관념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을 긍정할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속았다’, ‘하느님은 역시 우리 편이 아니구나’를 연신 외쳐대며 교회의 골목길을 벗어나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반면 개신교의 대형 종교시설도 이러한 류의 복잡한 자본의 부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밀착형 선교 전략으로 그들은 전력을 재정비했다. 자본의 전쟁터에서 지친 이들은 교회에서 위로 받고 다시 전쟁터로 나가 싸워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하고 그것은 더 많은 기부로 이어지고 교회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실에서 대형종교 시설일수록 경쟁사회, 성과사회,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막강한 자본의 지원군이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느님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먹사니즘 문제’가 되면 면죄부가 발급된다. 


“어쩔 수 없지! 먹고 사는 문제인데..”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아주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모두가 고용의 안정성과 항상성, 임금의 적적성을 유지해야 사회가 안전하고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이다.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고 안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있다. 


공감능력을 상실한 교회 


아우슈비츠 학살의 기획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끝까지 유대인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였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는 그의 죄를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세 가지 무능을 언급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무능성은 곧 ‘판단의 무능성’을 의미한다!” 라고 말한다.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아렌트는 이해한다. 결국, 아이히만의 가장 큰 죄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이라 판결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세월호 문제가 지겹다’라는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지은 죄를 반복하는 역사의 판단을 받는 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임을 바라보도록 시대의 징표를 끌어안고 용기 있게 세상에 외쳐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들의 공통적인 부분은 ‘인재’, ‘관재’ 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들이었음에도 ‘돈’의 논리가 그러한 예방과 처치를 올바로 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너무 많이 보여 지니 국민들은 의혹을 가지고 진상규명과 ‘진실을 밝히라!’ 외치는 것이다. 1%와 99%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이러한 지루한 싸움이 늘 99%의 패배로 끝난다는 데에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있다. 


바로 우리시대의 징표는 ‘돈’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 사회 초극의 고난과 신자유주의로의 출구전략의 혼란으로 경제활동 가능자들이 종속적 ‘갑을 관계’ 안의 을로 아니 병과 정으로 추락하여 이제 그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들은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가난한 자, 힘없는 자, 무능력한 자와 함께 걷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 나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안겨줄 돈 많은 신자들과 더욱 친밀한 것은 아닌가!  


성직자, 수도자들이여! 그대들은 진정 지금 의심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행동하고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진정한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는 어느 새 공감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 전이다. 주교, 사제, 수도자들은 시늉을 하고 있다. ‘척’하고 있다. 가난한 척, 영성적인 척, 정의로운 척, 그러나 ‘척’은 오래가지 못한다. 


신자들은 금방 알아본다. 골프채를 휘두르는 주교와 신부들의 영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가난한 척 하는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이 실재로 얼마나 탐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지를 생각 있는 평신도들은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 골프를 치기에 여유 있는 나라는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4.3 제주 항쟁 기념일에도 4.16 세월호 참사 그리고 일 년이 지난 2015년 4.16에도, 5.18광주 민중항쟁 35주년에도 들판으로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신 주교와 신부들께 한 말씀 올린다. 


‘당신들은 무슨 돈으로 골프를 치는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대들이 교회 안의 악령입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