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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6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7-07-21 12: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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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지혜 12,13.16-19) 해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인자롭고 너그럽게 보살피신다>


지혜서의 저자는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길어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와 운명을 예견하거나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깊이 깨닫게 하려고 그러한 작업을 시도한다.


그가 우주의 기묘한 질서와 조화를 명상할 적마다, 우주의 놀라운 계획은 한없이 심오하고 폭넓은 섭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직감한다. 인생이 균형과 방향을 잡을 수 있음도 그 직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세운 장본인과 그 공적을 어떤 때는 지혜에게 돌리고 또 어떤 때는 하느님께 돌린다. 지혜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혜서가 쓰여진 지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서, 신약성경은 ‘말씀’을 계시하면서 하느님과 지혜를 동일하게 여긴다.


주님 홀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주님만이 모든 사람을 보살피시며, 주님께만 모든 능력과 권능이 있다. 그래서 정의는 모든 것의 주권(주인됨)을 주님께 돌려드린다.


시편 (85) 해설

<주님, 귀를 기울이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가련하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드리는 끈질긴 간청이다. 당신께 신뢰하고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임을 인정하여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라는 간청이다. 하느님께서는 인내심이 깊은 분이고 ‘쉽게 용서하고 자비심이 넘치는 분’(참조. 탈출 34,6)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우러르고 숭배해야 할 유일한 주님이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편작가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개입하시리라 확신한다.


제2독서(로마 8,2-27) 해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므로,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흔히 너무도 성급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세상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이상, 겉으로 나타나는 성과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역사는 대개 겉으로 드러난 커다란 사건들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역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힘차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은 그 하느님의 역사에 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단지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단호한 결단과, 고통스런 신음과 수난이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뜻을 세우는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 은총을 간구하신다. 성령께서 간청하시는 바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익하고 선익이 되는 생명과 구원이다.


복음(마태 13,24-43) 해설

<수확할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어느 누가 자기는 좋은 씨앗이요, 가라지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누구든 자칫 방심하고 깨어 지키지 않으면 그릇된 길로 빗나갈 수가 있다. 욕심에 살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자만하고 자신하는 순간이 실은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다. 


주님께서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니요 약하기만 한 사람을 어지심과 자비로우심으로 대하고 거듭 용서하신다. 죽어 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지는 순간까지는 약한 우리 사람을 견뎌주는 하느님이시다. 끝까지 돌아서기를 촉구하며 인내로이 기다리는 분이시다. 자칫 잘못했다 하여 당장 내려치고 없애버리지 않으신다. 경고하는 뜻으로 벌도 내리시만 마지막까지 견뎌주신다. 그러나 끝까지 알면서 고의로 못된 길을 고집하면 언제 당신의 심판을 할지 모른다.


내가 잘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으며, 잘하면 계속 잘 하도록 노력하고 잘못하면 돌아서야 하듯이, 세상 안에는 올바르게 사는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고 그릇되게 사는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릇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릇된 길에 빠진 사람은 속히 바른 길로 돌아서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견뎌주시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하느님처럼 인내로이 참고 용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끝까지 힘써야 한다.



묵상


하느님의 인내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섞여 있음을 발견한 주인의 반응은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인내심을 보여주고, 우리가 따라야 할 표양을 보여준다.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각과 마음이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밝히셨다. 사람은 너무 쉽사리 격분하고 싸우려 달려들고 복수심에 불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급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신다. 실상 그런 하느님께서 아니시라면 약한 사람은 누구나 멸망할 도리 밖에 없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범죄와 뭇 민족들의 범죄를 굽어보는 가운데 당신의 정의를 여지없이 드러내신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을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에, 인내와 자비로운 사랑에 못 이겨 죄를 범한 그대로 곧장 우리를 처벌하지 않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내는 약해서 참는 인내가 아니고, 회개를 촉구하는 인내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 2,13)


하느님의 인내는 예수님에게서 완전하게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과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 방탕한 아들, 냉혹한 종에 대한 비유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애 자체로 하느님의 인내를 증명하셨다. 


특히 수난하는 시간에 그렇게 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이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다 맡기셨습니다” (1베드 2,23)


사람의 인내


▲ ⓒ 최진


하느님의 인내와 예수님의 인내를 본받아,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의 잘못과 불의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참아주고, 서로 부축하고 격려하면서 바른 길로 계속 돌아서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을 지닐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카 24,26) 사람은 인내로이 고통을 참음으로써 구세주의 구원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8,17)


역경 가운데서 신자들은 주님의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 12,3) 신자들은 자기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 당하며, 그분의 생명을 드러낸다.


오늘 읽은 복음에도 인내하라고 초대하는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말에 심판이 내려지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라고 성급하게 판정할 수는 없다. 선인과 악인, 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우리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 판정은 추수하는 시기가 닥치면 하느님께서 몸소 내리실 것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고 불의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스스로 자기의 생활실천을 살피고 반성하면서 정의로운 길을 꿋꿋이 달리며, 잘못하여 불의한 생활에 떨어졌음을 발견하면 즉시 돌아설 필요가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인내로이 참아주고 질책도 해주고 칭찬과 격려도 해주면서 부축하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사람다운 처신이다.


우리 자신 속에 벌어지는 선악의 갈등


밀과 가라지는 세상이라는 밭에만 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숙한 밭에도 섞여 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우리가 일생에 걸쳐 악과 싸워 이김으로써 얻어내야 할 구원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상황과 처지를 로마서에서 극적으로 표현한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19) 우리는 결국 결정적인 해방과 구원을 ‘출산의 고통’을 거치듯이 얻어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이 같은 고통스런 대립을 겪고 있다. 우리는 악과 불의를 끊고 선과 정의를 선택하여 구원을 받아들이고 이루어가야 한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 선과 정의를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받는 수난의 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고, 자기도 다른 사람의 인내로운 도움으로 회개하면서 함께 구원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범죄와 불의를 인내와 용서와 질책과 뉘우침으로 깨부수는 사랑의 승리만이 서로를 건설하고 하나로 묶고 정의의 실현과 구원의 성취를 가져온다. 이렇듯 인내와 수난은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용기이다.





연중 제16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지혜 12,13.16-19)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께서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불의하게 심판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께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정녕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에만 당신께서는 힘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오만한 자세를 질책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시편(85)

주님, 당신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나이다 


제2독서(로마 8,26-27)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간구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마태 13,24-43)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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