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무덤이 많지?” 십자가 첨탑 규제 필요
: 십자가는 첨탑이 아닌 가슴 속에 모셔야
최근 중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산다는 저장성(浙江省)의 종교 당국과 건설 당국이 교회 십자가 설치를 규제하는 조례 제정 절차에 들어갔다고 한다. 미국의 소리(VOA)에 따르면 ‘종교건축관리조례(안)’에는 십자가를 교회 꼭대기가 아닌 본당 정면에 설치해야 하며 십자가 높이도 교회 건물의 10분의 1로 제한하고, 십자가 색깔도 교회 건물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화교들의 종교 단체인 ‘대화원조협회(對華援助協會)’는 “교회 십자가 철거는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의 인지도를 축소해 그 발전 추세를 막으려는 전략의 일환”이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이는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저장성 원저우(溫州)에서 지난해 7월 교회당 십자가 철거를 둘러싸고, 그리스도인들과 경찰 간에 유혈 충돌이 빚어져 상당수 신자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한 사태와 더불어 갈수록 심화되는 중국 당국과 교회 사이의 긴장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로, 향후 10년 내에 1억 60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대도시의 밤을 휘황하게 밝히는 교회 십자가 첨탑, 그 공해
십자가 설치 규제에 대한 논란을 보며 문뜩 지난 2011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교회 십자가와 첨탑을 ‘인공조명에 의한 빛공해방지법(이하 빛공해방지법)’ 제정안에 적용시킬 것인가 논의할 때, 교계 보수단체들의 “십자가를 끄는 것은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며 한국 교회의 존재감을 무력화하는 발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반발이 생각났다.
그때 환경부 장관이 “밤하늘에 교회의 십자가만 가득하게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가 뭇매를 맞았는데, 결국 2013년 2월부터 시행된 ‘빛공해 방지법’ 시행령 적용대상에서 교회 십자가와 첨탑을 제외시켜야 했다.
영화 <도쿄 택시>에 보면 택시 타고 한국에 온 일본인 주인공들이 서울 야경의 십자가를 보면서 “왜 이리 무덤이 많지?”라고 내뱉는 대사가 나오는데, 한국의 도심지 밤풍경을 하늘에서 보면 마치 공동묘지 같다고 할 만큼 ‘십자가 공해’다.
최근에 와서 야간의 ‘빛 공해’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지자체에서 관련 조례를 제정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앞에서 얘기한 ‘빛공해 방지법’은 물론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 의해서도 제재를 받지 않아 밤새 붉게 빛나는 십자가 조명 때문에 수면 방해받았다는 민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앞에 개신교 일각에서도 자발적으로 십자가 조명의 조도를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안양시에서는 기독교단체연합회인 시목회와 협의 끝에 지난 2012년부터 심야 시간(밤 11시부터 새벽4시까지) 십자가 소등 운동을 벌이고 안전사고의 위험이 큰 십자가 철탑 100여개를 예산을 지원해 철거했다. 2010년 도심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로 안양 시내에서 20여개의 교회 철탑이 쓰러지거나 날아간 사고를 겪고 난 후였다.
십자가는 광고효과를 극대화해 호객행위를 하는 옥외광고물?
언제부터 한국 교회에 이런 십자가 첨탑 경쟁이 불었을까. 신구교 합쳐 전국민 대비 그리스도교 신자비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도 나라에 세계 10대 교회의 절반을 몰려있는 메가처치 왕국, 소위 교회마다 ‘삼박자 축복’이 외쳐지던 외형적 급성장기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그런 성장기에는 성장기대로 교회로 신자들을 모으기 위해 십자가를 드높이 세워야할 경쟁이 필요했다. 사회의 모든 것이 팽창하던 경제성장 시대에는 교회도 호황기였고 당연히 호객행위가 중요했다.
하지만 2000년에 들어서면서 성장의 호황기가 지나자 이번엔 마치 불황기에 술집이나 상가들이 고객 쟁탈전을 펼치듯이 다시 첨탑 경쟁이 교회 내부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정이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선 교회 십자가를 기념물이나 상징물로 보아 옥외광고물로 규정할 수 없다지만, 이미 첨탑 십자가는 광고효과를 극대화해 호객행위하기 위한 옥외광고물 외 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낮은 곳으로 향했던 예수운동, 한없이 높은 곳만 쳐다보는 메가처치
예수께서 처형당하셨던 십자가는 무자비한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과 거기에 희생당한 자의 저항(부활)의 의미인데,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뜻은 사라지고 만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처럼 쓰여 지기까지 한다.
2000년 전 갈릴리 땅에서 펼쳐졌던 예수운동은 끝없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2000년 후 한국 교회의 예수 십자가는 한없이 높은 곳만 쳐다보고 있다. 대형 교회, 소위 메가처치의 첨탑은 무슨 바벨탑 꼭대기를 지키는 권력과 자본의 상징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외친 십자가의 복음(1코린 1,18~24)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표징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이나 세속적 지혜를 찾는 그리스인들처럼 십자가가 그저 어리석은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는가.
고흐의 그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제목처럼 별이 빛나는 고을의 집집마다에서는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유독 첨탑의 교회만 불이 꺼져있다. 이 그림만이 아니라 고흐의 다른 그림에서도 교회는 모두 불빛이 나오지 않는데, 복음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그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고흐 나름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고흐 시대만 그러할까. 지난해였다. 평소에 존경하는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를 만나러 강화도 심도학사(尋道學舍)를 찾아갔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관과 교회의 장애인사업에 관한 인식 연구’를 전달하고 차를 마시며 환담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한국 그리스도교 현실과 교회 개혁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그때 인상에 남는 코멘트가 ‘한국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굳이 개혁의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으로 양식 있는 이들은 다들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광고효과조차 없을 만큼 오도된 첨탑 십자가만큼이나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린 교회 현실에 대한 뼈아픈 진단이었다.
사회복음화를 위한 선교의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십자가 공해라 할 정도로 개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본말전도의 현실. 그래서 종교 탄압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 당국의 규제와는 다른 의미로, 한국 교회의 첨탑 십자가 경쟁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교회 스스로 나서면 최선이지만, 자율적인 규제가 힘들다면 시민사회적 압박도 필요하다고 본다.
십자가는 첨탑이 아닌 가슴 속에 모셔야
문득 시인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가 떠오른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인류의 모든 짐을 지고 괴로워하셨지만 그래도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셨기에 오히려 행복했을 청년 예수를 그리며 자신에게도 그런 희생의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식민지 시대의 암흑기 한 가운데에서 민족의 아픔을 껴안은 속죄의 어린양으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며” 그가 그토록 닮기를 소망했던 청년 예수, 33세에 돌아가셨던 그분보다 더 젊은 나이 28세에!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십자가를 모실 곳은 교회 첨탑이 아니라 시인 윤동주처럼 가슴 깊은 곳, 삶 한 가운데, 자신의 죽음과 함께여야 할 것이다.
정중규 :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며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복지포럼 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