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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9-15 18: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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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좌), 성 정하상 바오로(우)


제1독서(지혜 3,1-9) 해설

<하느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완전한 희생 제물같이 받으셨다>


의인은 바른 양심과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신앙의 진리에 따라 모든 사람을 귀중한 하느님의 자녀로 대우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꾸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올바르게 살지 않는 불경한 사람들에게서 핍박과 박해와 수탈을 당하게 마련이다. 의인은 흔히 허깨비 같은 무리들한테서 부당한 연민과 조롱과 멸시를 받기 십상이다. 그들 무리는 약삭빠르고 영악하고 비정하고 탐욕스럽고 잘나 보이고 싶고 수고스럽게 일하지 않고도 남을 부리고 남위에 군림하고 싶고 자기가 유능함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돈과 재산이 있음을 무슨 자랑거리인 양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의인을 하찮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대하고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놀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한다. 그러나 실상 손・몸・머리로 죽도록 일하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먹을 양식이 생기고 입을 옷과 살 집이 생기고 소위 건설과 문명이라는 것도 이루어진다. 죽도록 일하는 소박한 마음씨를 지닌 그 수많은 사람들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그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펄펄 살아 있고 힘차게 창조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다.


경쟁과 빼앗기와 살육과 전쟁을 일삼는 자칭 똑똑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과 권력을 쥔 자들은 자기네가 나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가고 형성해 간다고 엉뚱하게 착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창조 사업과 구원사업, 인류를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위대한 사업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당신과 더불어 일하는 협력자로서 이름 없이 일하다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인류 대부분을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왕이시고,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과 함께 진정한 인류 역사의 살아 있는 주역들이다.


시편(125) 해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뼈 빠지게 일해서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 그들이 일한 덕택에 별로 힘들게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먹고 사는 세상, 그렇다고 누가 얼마나 고마워하거나 알아주지 않고 그저 더 일하지 않으면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그 사람들, 몸이 아파도 골병이 들어도 당장 가진 것이 없으니 별 수 없이 일하면서 차츰 병들어 죽어가야 하는 그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일하는 노동의 씨앗은 결코 헛수고가 되지 않고 말라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씨앗이 깜짝 놀랄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음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제2독서(로마 8,31b-39) 해설

<죽음도 삶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편이시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사람들이 우리다. 전능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듯 애지중지하면서 편들어 주고 계신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편드시어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우리를 그토록 열성스레 편들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한없는 정과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면, 그분들이 소원하시는 무엇이 있다 할 적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뚱이를 으깨서라도 우리 자신을 깡그리 바치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면 굶주려도 좋고 헐벗어도 좋고 환난・역경・박해・위험・칼을 받아도 좋고 날마다 그분을 위해 종일토록 죽어가도 좋고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아도 좋다. 그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그분을 위하는 시련이라면 달게 받는다. 살아도 죽어도 우리는 그분들 편이고, 그분들도 우리 편이시다.


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가장 순수한 사람, 가장 사람다운 사람, 사람을 하느님 자녀로 애착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소망을 채워 드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울고 웃는 일꾼들이다. 스스로 자기가 그 ‘우리’에 속한다고 자부하거나 내세울 줄도 모르면서도 실천적으로 사실상 그 ‘우리’에 속해 있는 무수한 사람들, 일꾼들이다.


복음(루카 9,23-26) 해설

<나 때문에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얻으리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오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가? 하필 어둡고 우울하게도 무시무시한 십자가가 나오고 죽음이 나오는가? 건강도 좋고 재산도 좋고 향락도 좋은데, 어째서 그리스도처럼 살자면 나날이 신음과 고통과 고민과 고뇌에 찬 어두운 세월과 일생을 견뎌 내고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밝고 즐겁고 깔깔대고 희희낙락거리고 쉽게 살아가는 방식도 있지 않는가? 욕심껏 온 세상 재물과 권력을 다 얻는 것은 아닐망정, 능력껏 다소라도 만족할 만큼 재물을 쌓고 위신을 세우는 것으로 인생목표를 삼아도 되지 않는가?


땅 위에 사는 인생살이는 어쩔 수 없이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대결을 벌이는 전장(戰場)이다. 내 양심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선악이 대립하고 갈등을 빚듯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가정・사회・국가・세계 속에서도 선악이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선이란 서로 위해 주고 재물과 정을 나누면서 합심하려는 노력이요, 악이란 서로 빼앗고 잘난 체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전쟁을 벌이면서 분열하려는 음모다. 선, 즉 합심을 추구하는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요 그러한 삶은 이 세상에서는 별 도리 없이 날마다 고통을 가져오고 어떤 경우 죽음까지도 불러들이게 된다.



묵상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회 1784년 창설된 이래 거의 100여 년간에 걸쳐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당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의 동료들은 수년 전부터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그 동료들의 부탁과 격려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여 종전부터 교리를 연구해 오던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새로운 입교자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선교사 없이 스스로 신앙을 찾아 얻은 것은 세계 천주교회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새로운 가르침은 전통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전근대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던 조정에서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 정책은 100여 년간에 계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대략 10,000여 명의 신도들과 십여 명의 성직자들이 순교하였다.


한국 교회사에 등장하는 첫 순교자는 김범우로서 1785년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아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귀양 가는 도중에 고문의 여독으로 목숨을 잃었고, 1791년에는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을 보냈으나 이 선교사들도 1839년 박해와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리고 박해 시대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부로 서품되었다. 첫 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도 신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며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 신도들을 위한 봉사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비록 순교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생활은 연속되는 순교 그 자체였다. 이들의 순교와 봉사는 교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박해시대 교회의 특징


박해시대의 한국 교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첫째는, 당시 교회의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다. 이 종교적 열정은 한글로 번역된 복음 성서와 교리 서적들의 공부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당시 신도들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심어 주어 계속되는 박해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종교적 열정은 천주교를 새로운 삶의 지혜로 인식한 민중들에게 더욱 강렬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천주교를 민중 종교운동의 차원으로까지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박해 시대의 신도들은 천주교를 종교적 복음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까지 인식했다는 점이다. 신분제도의 억압에 시달리던 많은 이들에게 천주교 교리에 내포된 평등사상은 새로운 사회적 복음이었다. 즉 당시의 신도들은 양반, 중인, 상인, 천민 등의 엄격한 신분 제도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한 형제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도 남성도 동등한 인격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그들은 한글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보급시켰다. 이것은 평등하고 보편적인 사회 문화를 형성하려는 노력의 한 표현이었다. 당시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던 그 같은 태도가 천주교의 신앙이 동시대인들에게 사회적 복음으로까지 인식되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박해시대의 신도들이 세속적 권위보다 종교적 권위를 우위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의 부당한 명령보다 하느님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천주교를 금하는 국법을 어긴 죄인이 되어 “양반 사대부에게 벌을 받을지언정 하느님께 죄짓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순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양심의 법이 가장 귀중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종교가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동양 문화의 전통에 젖은 집권층에게 그들의 태도가 용납될 리 없었다. 이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더 심해졌던 것이다(이상 ‘이 땅에 빛을’에서 발췌).


우리 시대의 순교 자세


그리스도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 하는 사람은 누구나 순교까지 각오해야 할 것 같다. 우리 한국 사회가 그렇고 국제 사회가 그렇다. 진정한 사람, 진정한 그리스도인일진대 도저히 평안하게 안주할 수 없고 돈벌이에 몰두하고 향락에 기울어질 수 없는 촉박한 시대상황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으로 살고 가신 당신의 복음, 기쁜 소식이란 탐욕과 불의와 전쟁에서 억눌리고 혹사당하고 배고프고 죽어가는 대부분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역사(役事)이다.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며, 실상 그분이 그런 사람 중의 하나셨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밥과 잠자리와 소비생활 수준을 그런 사람들과 똑같이 하며, 소유와 소비에 있어 그들과 똑같이 되며,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들의 대열에 끼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승리에 도달했듯이, 이 시대를 수난으로 걸머지고 묵묵히 행진하는 참으로 사람다운 그리스도인들이 힘차게 인류의 하나 됨과 부활의 승리를 향해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순교를 각오한 자세란 온 인류, 작게는 이 나라 이 민족이 모두 재물욕・명예욕・지배욕에서 벗어나 따뜻한 마음의 성장과 균등한 공동발전과 합심의 기쁨을 얻도록 하기 위해 투신하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수난하는 십자가의 일생을 말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독서·복음



제1독서(지혜 3,1-9)

<하느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번제물처럼 받으셨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시편(125)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제2독서(로마 8,31ㄴ-39)

<죽음도 삶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 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루카 9,23-26)

<나 때문에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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