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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5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9-22 16:34:15
  • 수정 2017-09-22 16: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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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5,6-9) 해설

<가까이 계시면서도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책’(제2이사야의 작품), 구원을 선포하는 위대한 시(詩)가 결론에 다다른다. 구원은 거룩하고 유일하고 초월해 계시고 엄위로우신 하느님의 영도 아래 복된 땅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구원하기 위하여 옆에 와 계시는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과는 그 생각과 길이 다르고 높은 하느님이시다. 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6-7절에서, 옆에 와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찾아 모셔야 할 분이시라고 말한다.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급박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먼저 주님의 뜻을 살피고 주님께 여쭈어보는 것을 뜻한다(참조. 탈출 18,15이하; 1열왕 22,5-8; 2열왕 3,11; 8,8 등). 그 외에도 주님의 집 안에서 그리고 경신례 가운데서 그 분을 옆에 모시고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참조. 시편 24,6; 27,4-8; 즈카 8,21). 그러나 주님을 온전하게 찾는다 함은,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이 행한 설교의 영향을 받아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주님을 찾는 자에게, 당신은 가까이 계시고 구원을 주며 용서를 베푸신다.


동시에 제2이사야의 하느님께서는 아주 거룩한 분이고,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다(40,10 이하; 41,16; 42,8; 43,3-11이하; 44,6 이하 등). 남의 잘못을 좀체 잊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기 쉬운 우리와 아주 다르게,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 사람은 그런 하느님을 본받아야 한다.


시편(144) 해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들어 높입니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임금이심을 묵상하고, 그 응답으로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 영원토록 찬양한다(2-3절).


이 시편은 논리적인 정확한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통일성 내지 보편주의적 개방성을 보이고 있다.


제2독서(필리 1,20ㄷ-24.27ㄱ) 해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바오로는 여기에서 자기가 박해를 받는 상황과 이유를 설명한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여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바오로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설명한다. 신자는 살거나 죽거나 세례와 성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다. 이 일치를 바오로는 비상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기의 육체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지고 다니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기의 육체로 완성하는 것으로 기뻐 용약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바오로를 통하여 나타나고 확인되었다.


어떤 의미로 바오로에게는 살고 죽는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유일한 관심거리와 소망은 그리스도께 있었다(22절).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도 더없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바오로는 죽으면 곧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살아서 사람들의 믿음을 북돋아주고 기쁨을 줌으로써 그리스도께 봉사하고 싶다고 말한다(22-24절).


27절에서 바오로는 자기의 상황을 설명한 다음, 신자들도 자기처럼 복음을 받은 사람답게 처신하라고 촉구한다.


복음(마태 20,1-16) 해설

<내가 후하다고 시기하는 것이요?>


이 대목의 주제는 마지막 늦게 와서 일한 사람들에 대한 주인의 후한 처사이다. 이 너그러운 저사를 놓고 불평하며 옳으니 그르니 하는 사람들을 놓고 예수님께서는 ‘첫째와 꼴찌’에 관한 마지막 말씀을 해 주신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바리사이파를 반대하는 논쟁이 깔려 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소경을 낫게 하신 이야기(20,29-34)도 그러한 논쟁을 뒷받침하는 이야기일 테고, 특히 두 아들의 비유(21,28-32)도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야기와 비유의 뜻을 종말론적 상황이 아주 뜻밖의 이상한 형태로 들이닥치리 라든가, 하느님께서 너그럽게만 보상해 주시리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도 그 이야기와 비유는 정확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복잡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배경과 관계란, 마태오 복음서가 생겨난 시리아-팔레스티나 공동체 안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들과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났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보고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바리사이들이 크게 곤혹스럽게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을 누구에게나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공으로 주고, 자유로이 주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의 무슨 자격이나 공로에 따라 의당히 내려지지 않고, 당신의 뜻을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당신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한없이 큰 선물인 것이다.



묵상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새벽에 와서 힘들게 일한 사람이 해거름에야 와서 잠깐 일한 사람과 똑같은 보수를 받았다는 비유는 복음서에서 가장 뜻 깊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비유는 일상적인 우리의 사고방식・행동방식과 그리스도의 혁신적인 태도를 대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과 맺으시는 계약은 “네가 베푼 만큼 나도 베풀겠다.”는 형태의 계약이 아니다. 그 계약은 온갖 인간적인 안목과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정의의 계약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계산을 따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자기 공로와 공적이라고 내세우는 데 따라 어쩔 수 없이 보상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은총은 아무도 자기 자신의 자격으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이다.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위대하고 생명까지 던졌더라도, 그 은총을 받을 자격은 결코 되지 못한다. 먼지 한 톨의 자격도 되지 못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고 감히 바랄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한 선물이다. 그 선물은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 모든 재화와 좋은 모든 것의 주인인 하느님, 한없이 아름답고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선물이다. 이런 선물을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자유스럽게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베푸신다. 마음을 비운 사람, 마음속에 은밀하게 숨겨진 재물·명성을 차지하고픈 욕심을 버린 겸허한 사람, 정의와 평화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아마 그 분의 마음에 들 것이다.


실상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하느님의 행동방식은 우리의 행동방식과 같지 않다. 우리의 가치척도와 판단기준은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사람으로서는 오로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건하게 받들고 실천할 일만 남는다.


사람이 제 스스로 아무리 계획하고 건설하고 역사를 이룩해간다 해도,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참된 공동선을 이룩할 수 없다. 우리 인생과 인류의 역사가 의미를 찾고 공동선을 기약하려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과 인류 역사를 다스릴 수 있으시게끔 자신을 비우고(이기심과 공명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차원에 자신을 열어드리기


예수님께서는 비유 이야기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끝없이 자비하신 마음과 사랑 앞에 서게 하신다. 동시에 사람 마음의 옹졸함을 보여주신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마음과 정신이 텅 빈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쌓은 공로와 공덕으로 마땅히 하느님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느님을 위한답시고 일생 죽도록 고생하고 공적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하느님도 별 수 없이 나에게는 푸짐한 포상을 내리시지 않을 수 없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신자도 아닌 사람들과 어찌 비길 수 있으리 하면서 자신만만해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고방식을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연히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았거나 부모가 신자여서 자연적으로 신자가 되어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착실하여 냉담하지 않고 주일을 착실히 지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조금씩 동정할 줄도 알고, 교회활동도 꽤 열심히 하니까, 이대로만 계속하면 천당 입장권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이런 식의 바리사이적 사고방식으로 안주하고 자신에 차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뿌리부터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거름에 부르실 사람들은 하느님만 알고 계신다. 그 부르심으로 당신의 구원 사업이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겸허한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실 것이다. 신자요 교인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는 결코 구원의 보장이 되지 못한다. 신자라 함은 근본적인 사명 수행을 요구한다. 그 사명을 실천하지 않는 신자는 이름뿐인 신자다. 그 사명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섬기라는 것이요, 온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몸 바치라는 것이다. 그 결심과 결단에 따라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신자만이 참된 신자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겸허한 무리에 속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부르실 당신의 사람들은 이기심과 공명심에 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느님의 자녀들의 친교의 기쁨’을 위해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들 모두이다. 하느님께서 마지막까지 누구를 부르실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연중 제25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5,6-9)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시편(144)

주님께서는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나이다 


제2독서(필리 1,20ㄷ-24.27ㄱ)

<나의 기대와 희망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보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 간에, 여러분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십시오.   


복음(마태 20,1-16)

<내가 후하다고 시기하는 것이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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