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 중순께 발표할 환경회칙의 명칭이 ‘Laudato Sii'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바티칸 언론들이 밝혔다.
이 말은 지상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찬미로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중에서 뽑은 것이다. 이는 ‘찬양 받으소서’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Be Praised' 또는 ‘Praised Be' 등으로 번역되는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Laudato Sii'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불 형제’, ‘물 자매’ 식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1224년께 쓴 ‘태양 송가’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Sulla Cura della Casa Comune' (On The Care of The Common Home)라는 이탈리아어 부제목으로 발표되는 회칙은 지구 기후변화에 대해 교황의 견해를 공식 표명하는 것이어서 이미 전 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회칙에는 5가지 주요 주제들이 포함될 것을 예상된다.
첫째, 지구 온난화는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활동 때문이라는 과학적 결론을 받아들인다.
교황은 최근 열린 바티칸 회의에서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과학적 진실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과학을 잘 모른다면서 이를 비판하는 논문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갈릴레오에서 보듯, 수세기동안 과학과 관련하여 많은 오류를 범해왔다.
비판자들의 지적과는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학 교육을 받은 최초의 교황으로, 수도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화학을 전공한 화학자로서 활동했다. 교황은 그를 비판하는 그 누구보다도 더 과학적 훈련을 받았다.
둘째, 환경운동의 입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모든 환경운동을 인정하고 포용한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교회와 환경운동가들은 불편한 관계였다. 환경운동가들은 교회의 인공피임 반대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예전에 비해 그 비판 정도가 많이 약해졌다.
교회가 뭐라고 하든,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를 것이고, 출산율을 낮출 것이라는 점을 환경운동가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과 문화적 요소가 교회 가르침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양 측은 피임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지만, 지구 살리기에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화해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환경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이 좀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북극곰을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풍요한 삶을 희생하도록 해 왔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은 오래 전부터 좀 더 단순한 삶을 권장해 왔다.
따라서 교회의 환경운동에 대한 지원은 환경운동이 주류가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환경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문제다.
만일 해수면이 상승한다면 방글라데시의 경우에서 보듯이, 수백만 명이 환경 피난민이 된다. 만일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빙하가 사라진다면, 수백만 명에 대한 물 공급이 끊길 것이다. 21세기 말 환경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제1,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보다 많을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류가 겪게 될 고통이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윤리적 문제란 말인가?
넷째, 환경문제 토론에 윤리적 렌즈를 들이댈 것이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부터 세상은 잘 보존해야 할 하느님의 선물이지 약탈 대상은 아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자연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는 명상의 대상이다. 따라서 자연파괴는 곧 신성모독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계획의 오른 편에 서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는 진화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다섯째, 기후 변화 또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려는 시도 등이 초래하는 부담은 가난한 사람들만이 져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 미국을 비롯한 제1 세계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들에게 열대림 벌목을 중단하라거나 출산율을 낮추라거나 등의 요구를 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희생을 해야 한다. 탄소에 기반을 둔 경제에서 더 많이 이익을 본 사람들이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
반면, 회칙에서 기대해서는 안 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치적 권고다.
교황은 예언자이지 정치적 사제는 아니다.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보고, 전환이나 변화를 요구한다. 그 실천은 환경운동가, 경제인, 실업인, 관료 등의 몫이다.
또 하나는 기적이다.
회칙 발표 후에도 세상은 당장 바뀌지 않을 것이다. 회칙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할 수많은 토론 중의 한 부분이다. 회칙은 그 토론에의 초대장이다.
이러한 기대해서는 안 될 것들은 교황 회칙의 기본 성격을 말해준다. 즉 회칙에는 교황의 무류권이 적용되지 않는다. 신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문헌은 아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상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등을 공식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교회뿐 아니라 속세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