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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10-2: 절망 속의 희망
  • 이찬수
  • 등록 2017-10-31 12:02:37
  • 수정 2017-10-31 19: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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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섯 명의 참석자가 원음방송 신개벽포럼과 공동으로 레페스포럼을 진행했다. 이번 포럼에서는 종교와 국가가 교묘하게 결합되는 지점에 대해 냉철하게 비판하고, 그 극복 가능성 및 대안에 대해 모색했다. 


참석자 :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제정치학)

원익선(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병두(종교평화연구원장, 불교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철후(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종교평화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 자본주의 피라미드


폭력의 구조화에 기여하는 종교


이찬수: 큰 틀에서 보면 인류가 물리적 폭력을 줄이는데 불교의 평등사상 같은 것도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에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개인의 주체성이 내적 욕망과 교묘히 결합되면서 요사이는 욕망도 존중받아야 할 것으로 가고 있지요. 이런 기반 위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에 기반 해서 무한한 사물 내지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성과를 많이 낸 사람이 더 유능한 사람이라며 박수 쳐줍니다. 하지만 성과를 많이 내려면 힘들고 피곤하죠. 지치면 위로 받고 싶으니까 대형 종교시설에 찾아갑니다. 그러면 스님이든 목사든 많은 성과를 낸 것을 하늘의 은혜로 여기면서 축복해줍니다. 


그런 식의 발상 자체가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기여하는 거죠. 경쟁을 통한 승리를 신적 은혜처럼 여기게 만들고, 사회를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들어갑니다. 인류의 역사에 물리적 폭력은 줄었지만 폭력이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바람에 폭력의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사라진 세상이 되었어요. 세상살이가 힘든데, 종교가 그 힘듦을 하늘의 복으로 여기게 만드니, 인간이 더욱 비인간화하는 거죠. 종교가 폭력을 구조화시키는데 공헌한다는 뜻입니다. 종교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자본 중심사회를 만들도록 추동하는 셈이고, 이런 배경에서 소형교회는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 합니다. 교당이든 포교원이든 비슷한 상황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보면 세상에 폭력이 줄어들어가는 데 종교의 공헌이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만… 종교와 자본의 문제랄까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기 성찰력이 유지될 정도의 규모여야


서보혁: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와 민족이 겹쳐져서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물리적 폭력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폭력이 진행되는 시간과 폭력의 강도가 아주 높아집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잖아요. 20세기가 끝날 때 쯤, 그러니까 냉전이 해체에 즈음해 다민족 공산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될 때 종교와 민족이 결합되어서 ‘인종청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인 학살이 심했죠. 코소보사태나 르완다사태를 떠올려보면 이념으로 나머지 갈등요소를 억제했던 냉전시기가 그리울 정도입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평화를 이상로 파악하기보다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기간으로 정의합니다. 생경한 정의죠.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3차 세계대전 위기까지 갔던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를 국제정치학은 크게 세 가지 시각에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합리적인 이익계산과 상대방의 합리적인 이익에 대한 평가를 통해 전쟁까지 가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서 전쟁위기를 멈췄다는 겁니다. 두 번째 설명은, 그런 위기의 고조 및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주요 정책 결정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안전보장위원회와 같은 정책 결정 집단이 갖고 있는 조직 관행과 이익이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주요 정책결정자들 가령,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의 세계관과 상황 인식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입니다.


이 중에서 두 번째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조직 결정 모델이라고 하는 두 번째 설명 방식은, 조직이 커지고 경직되면 조직 자체의 이익 메커니즘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 확대판으로 국가와 종교 간에도 국가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 간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죠. 이런 것은 조직이 경직되어 있고 조직 내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이해관계가 원래 종교 집단이 만들어졌던 역사·종교적인 배경을 밀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더 큰 영향을 미칠까요, 종교단체의 이익(그 대행자로서 종교지도자의 이익)이 더 크게 작용할까요? 이는 종교 집단이 원래 종교 집단의 이상과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종교집단이 사이즈가 일단은 커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종교 내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종교 집단 내에서 그것을 주도해나가는 지도자 그룹과 종교의 구성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종교 민주화의 문제이죠. 이러한 조치가 없는 가운데 종교가 사회정치 문제에 관여하면 자신의 정체성뿐만 적절할 역할을 하기는커녕 사회적인 위상이 떨어집니다. 이런 폐해가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면 종교적 심성이 있는 사람이 그 종교집단을 통해서 영성을 찾으려 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추구하는 개인 심성과 괴리가 커지는 것이죠. 그 결과 사회의 문제를 치유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종교가 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종교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 종교 내의 자기 정화 메커니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찬수: 평화가 가능하려면 종교도 자기 성찰력이 유지될 정도의 규모여야 하고, 민주화 훈련도 강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지당합니다. 그런데 좀 전에 일종의 이념이 갈등을 억제하고 전쟁을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얘기하셨는데, 이념이 전쟁을 멈추게도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폭력에 이른바 국가라는 시스템의 영향이 더 컸을까요, 아니면 종교 조직이나 문화 관련한 이념이 더 크게 작용했을까요. 


▲ 교황은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사진출처=EBS)


문제와 희망이 동시에


원익선: 그 문제를 말씀 드리기 전에 원불교 같은 경우에는 근대에 나온 종교잖아요. 동양의 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에 기반한 점도 있고, 한편으로 한국의 정신과 철학에 바탕해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놓고 보면, 원불교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민중 속에서 탄생했으며,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해석이죠. 개교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을 세운 소태산 대종사가 1891년도에 태어나 1943년도에 열반한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연해집니다. 그 시기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가 나와서 사용된 시기입니다. 대량살상무기는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나잖아요. 폭탄 하나로 수십 만 명을 대량학살을 하는 시기가 소태산 대종사와의 일생과 딱 겹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연장선에서 국지적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요즘 생각하는 것은 원불교야말로 인류의 가장 비참한 시기에 나온 종교다, 그 시기에 나온 근대종교들 또한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폭탄은 자본주의와 과학이 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결정은 미국경제의 군산 복합체라는 기형자본주의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런 걸 놓고 보면 종교는 인류의 좀 더 현실적이고 근원적인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순과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사회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그 시기에 종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성종교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을 근현대 종교가 해결해주고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형성의 동기가 되는 밑바탕에는 전쟁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와 과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인식은 지금과 향후 우리가 자본주의와 과학, 그리고 이것에 의지하고 있는 정치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고민으로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병두: 저는 요즘 쉽게 말해 저 혼자만의 고민, 화두를 갖고 있습니다. 흔히 불교는 평화의 종교로 전쟁을 별로 안 치러왔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대표적인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 불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스리랑카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긴 세월 동안 불교 민족주의가 일어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타밀족을 몰살시키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 승려의 사진을 보면 “승복을 입기는 했지만 중이 맞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연원을 계속 더듬어 가보면, 영국 식민 지배를 받기 전에는 없던 일이었습니다.


미얀마의 경우에도 한국보다 먼저 천주교가 들어가 500년의 역사가 되어서, 추기경도 있고 주류 종교인 불교와 평화롭게 존재해 왔었는데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불교와 결합을 하면서 현재 미얀마 내 소수 종교인 무슬림들이 그 피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새로운 소식을 보면 다행인 것이, 이 문제를 불교계가 나서서 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슬림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승려에게 미얀마 승단에서 강하게 징계를 내렸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는데, 이런 일들이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할 역할은 증오와 분노의 확산이 아니라 그것을 누그러뜨리고 화합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니까요.


무엇이 폭력에 가까운가, 로힝야의 경우


서보혁: 앞에서 종교와 민족이 겹쳐져서 그들 사이의 갈등이 생길 때 상당히 심각하고 대량살상이 일어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집단이 민족이든지 종족이든지, 그 집단의 생활양식은 물과 강과 햇살, 말하자면 적절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정착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 터전을 강제로 쫓겨날 때 평화도 같이 증발해버립니다. 그 후 만들어진 고요함, 물리적 폭력이 지나간 후의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제국주의세력으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몰아내고 자기 문화를 강요한 후 만들어진 질서는 거짓 평화였습니다. 르완다 사태도 그렇고 동티모르 사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 미얀마(버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 탄압도 사실은 영국이 버마족을 편하게 식민통치하려고 방글라데시에 살던 로힝야족을 이주시켜서 생긴 일이죠. 그에 앞서 스리랑카 싱할리족이 타밀족을 학살한 후 타밀족이 살던 자프나(실론섬 동북지역) 일대에 고급 리조트를 만들어 관광업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 피난 중인 로힝야족들 (사진출처=CNN)


종교가 결국 평화·생명·영성이라 한다면 일반 근로대중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념이나 특정 종교적 지향의 확장 욕구, 특정 민족의 이익 극대화 욕망이 평화·생명·영성을 앗아갔습니다. 권력과 이익의 결합이 그 이유입니다. 이때 권력과 이익의 범주를 정치로만 한정할 수 있을까요? 


정체성 갈등의 문제


정주진: 말씀 하신 것은 정체성과 관련한 갈등, 정체성 갈등(identity conflict)과 관련지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체성은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흔히 정치적인 면도 포함됩니다. 한 사람의 삶의 환경에서 무엇이 정체성 위계질서의 가장 위쪽에 위치하느냐가 정체성 갈등의 형성과 전개를 좌우하고, 정체성의 충돌로 야기된 갈등은 잘 해결되지 않고 무장갈등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체성은 아주 중요한데, 한국사회에서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종교가 정체성 위계질서의 위쪽에 위치하는 것 같지는 같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종교인지, 민족인지, 아니면 돈인지 의문이 생기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것이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로 여기기도 하는데 일상에서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불안정한 시대를 겪었고 무력 충돌과 전쟁을 겪었지요. 지금도 무력 충돌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종교가 한 목소리로 나서서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전쟁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정한 것도 아니고, 무기경쟁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안보 담론에 대해 한 목소리로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사실 거의 모든 종교가 자신은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지만 평화의 원칙이 없는 겁니다. 각자 이야기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사드배치나 해군기지 건설 같은 특정 사안들에 반대하는 것이지 전쟁 준비와 개시를 가능하게 만드는 국가 시스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교가 국가와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지금의 종교 지도자를 포함해 종교 내에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에서 종교, 또는 종교적 가치가 정체성 위계질서의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가식적으로 평화를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가르침,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종교적 가르침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구조적 개념과 문화적 폭력의 개념을 고안한 갈퉁은 문화적 폭력의 범주에 종교적 가르침을 넣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이 진짜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사람에게 특정 가치와 생각을 강요하면서 우매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종교 안에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그리고 이단으로까지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 신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종교는 그런 구조와 환경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사람이 우매해지고, 사회에서는 멀쩡한 사람이 종교 집단에 가면 꺼벙한 사람이 되기도 하죠. 분석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만, 다시 말해 종교 지도자만 쫓아갑니다. 종교집단이 정말 종교적인지 항상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사실 종교집단은 많은 경우 폭력적입니다. 폭력집단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구성원이 있어야 하지만 종교는 내부에 그런 사람들을 거의 키우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북한에도 군종이 있다면


원익선: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통계학적으로 나와 있는데 전 지구적인 분쟁 가운데 실제로 60% 이상이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국가의 헌법을 보면 인간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지키도록 되어있습니다. 만약 예를 들어, 국가가 자의이든 타의적이든 자신의 백성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끌려갈 때는 결국 이러한 헌법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뽑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했지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전쟁은 결국은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동물들 특히 뱀 같은 경우는 죽고 나서도 건드리면 독을 쏩니다. 죽기 전에 자기 방어를 하면서 죽은 것입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육체는 독을 발사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죠. 국가가 자의든 타의든 전쟁에 참여해서 자식을 내놓으라고 하는 때 이미 국가의 역할은 사라진 것이며, 지도자는 자신의 책임을 지지 못한 것입니다. 전쟁은 이러한 무능한 국가가 마지막으로 프로그래밍 해놓은 것이 자동적으로 실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군대에는 군종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북한에서도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불교의 포교가 잘 돼서 북한 정부에서도 인민군에게도 군종을 넣어달라고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목사, 신부, 스님, 교무들끼리 서로 자신의 종교 동료는 물론 종교인들끼리 총부리를 맞대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끼리 전쟁을 치루는 것인데 이는 굉장한 모순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막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군종은 전쟁을 막는 역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든 국가든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모든 종교는 전쟁에 반대해야 하고 그 전쟁에 대해서 종교가 연합이나 단합해서라도 해서 결단코 막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의 모순은 물론 종교의 모순도 서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한 종교든 국가든 현실적으로 그 존재이유는 있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이름의 군대


서보혁: 지금까지는 이론적이고 규범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현실적인 이야기, 한국의 현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한국이 지금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평화유지활동(PKO)을 한다는 명목 하에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하고 우리의 헌법에 국회의 동의를 갖고 파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때의 베트남 파병과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은 국회의 동의는 받았지만, 그러나 헌법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헌법 정신에 반해서 이루어진 파병입니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이잖습니까. 유엔 안보리의 결의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베트남 파병 때는 국회에서 약간의 반대토론 말고는 비판여론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민주주의 시대에 파병이 되다보니 상당히 많은 논란과 반대 속에서 추진했는데 당시 일부 종교단체에서 파병반대운동에 동참을 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한 종교(집단)가 단일한 입장이나 색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파병 지지, 반대, 침묵 중 어느 입장이 종교의 본성에 알맞은 겁니까?


우리가 계속 사회와 세계를 나와 적, 선과 악으로 나누는 습관이 곧 폭력이 일어나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행동방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개인적 차원에서 종교 심성이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도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갖는 이들



이찬수: 저는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폭력을 줄이는 과정도 그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평화도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죠. 제가 ‘자기중심적 평화’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요, 평화가 나와 너의 상통성, 조화, 상생의 형태로 나타나기보다는 평화라는 말로 나의 안정과 나의 이익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많아도 평화롭지 않고, 평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 종교가 그렇게 많아도 평화롭지 않는 것은 자기중심적 평화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평화를 꿈꾼다는 뜻이기도 하죠. 어떤 종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종교인인 것이 아니라, 평화를 꿈꾸며 폭력을 줄여서 폭력의 상처를 얼마나 어루만지느냐가 종교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눈으로 보면 종교인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종교인이라는 뜻도 되고요. 


종교가 정치적 갈등을 전환시키려면


이찬수: 이제는 평화 문제를 아시아적 혹은 한국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토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과거사 문제도 있고, 독도 영유권 분쟁도 있고, 중국을 의식하는 미국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본의 군비경쟁도 있습니다. 아시아 가운데 한중일은 특히 한자문화를 공유하는 등 다른 나라에 비해서 문화적 동질감이 있습니다. 경제 교류 규모도 엄청 확장되고 있고요. 하지만 외교나 안보 차원에서는 갈등이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보는 위안부 문제와 한국인이 보는 위안부 문제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이런 문제를 가령 한국불교와 일본불교가 합의해낼 수 있을까요. 과거사 문제를 가지고 한국의 기독교와 일본의 기독교가 합의해서 양쪽 정부와 국민이 동의할만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을 할 수 있어야 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요. 문제는 전부 다 자국 중심적 사유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해야 기독교인도 그게 잘하는 일이라며 칭찬을 합니다. 대통령이 자국의 이익을 기반으로 해야 정치 잘한다며 불교인도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저마다 국익 중심적 판단을 하니까 국가 간 갈등도 지속되고 있는 거잖아요. 이 마당에 종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화를 키워드로 마무리 발언을 해주면 어떨까 합니다.


원익선: 일본에서 살아봐서 느끼는데요. 일본 국민들도 평화를 주장하고 과거 국가에 예속된 불교인들로부터도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도 견제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칸트의 영구평화론 같이 세계의 연방을 통해서 연방끼리의 역학 관계, 즉 힘을 나누고 견제하는 상태에서 전체적인 세계질서를 찾아가는 평화론이 적용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U내에서도 다소 불협화음이 있지만 그 체제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붑니다. 


또한 종교의 입장에서는 국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종교가 지역적으로 국한되어 있고 국가에 예속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원래 종교는 국제적인 연대성, 예를 들어, 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한국, 일본을 통해 유럽으로 가듯이 국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제성을 배경으로 오히려 국가의 초법성, 국가가 오히려 종교의 권위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을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국민의 의지에 반하는 국가의 방향에 대해서는 종교와 종교인들이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시민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 위험성, 불안요소들을 낮춰가면서 종교적 연대를 통해 우리 전체의 공동의 이익이 나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동아시아의 국지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종교가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떠나서 예를 들어, 종교인이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정치인을 종교인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라는 차원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주도면밀하게 종교 안에서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동시에 사회적 고통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상해서 방어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만약에 작은 구멍이 무너져 큰 댐마저 무너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야말로 칸트의 영구평화론처럼 지역공동체끼리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이 관계가 평화롭게 진행되도록 지역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인 역할 또한 활발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병두: 2012년도 세계불교도우회가 여수 해양박람회를 기념해 여수에서 열렸습니다. 문제는, 티벳 대표단도 초청받아 왔었는데 중국 대표단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외교관도 아니고 승복을 입은 중국 대표단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것,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 비슷한 일들은 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표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1960~80년대에 국제 행사에 북한 대표가 참석하면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들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중국은 종교행사도 당에서 통제를 하기 때문에 행사를 참관해보면 대단합니다. 불교 행사하는데 매우 화려하고 하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불안감으로 외국에서 온 대회 참석자들도 검열대를 통과하게 합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한국 스님들은 중국과 일본을 매우 부러워합니다. 일본은 정부 간섭이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중국은 정부에서 돈을 많이 대주는 것을 부러워하지만 정부가 간섭을 하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이죠. 아마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이런 딜레마를 갖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국 역사가 200년 조금 넘는 가운데 다른 나라하고 전쟁에서 유일하게 진 것이 월남전이라고 합니다. 월남전에서 처음 프랑스가 패하고 빠져나오고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려 할 때에 군부와 정치학자들이 동원된 쪽에서는 “월남에 개입해야 한다”고 했고, 동아시아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은 “우리가 실패한다”면서 “절대 월남 내전에 끼어 들면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지금 상황에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종교인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안이 생겼을 때 모두 전략가들이 전쟁 불가피론을 이야기해도 종교인들은 “전쟁은 안 된다”고 해야 하고, 명분 없는 해외 파병의 경우에도 종교인이 앞장서서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 내부가 평화로워야 하고, 종교끼리 평화로워야 하며, 종교와 종교 외부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도 갖고 있습니다.


이찬수: 이런 것은 결국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 아닐까요.



한계는 있지만 희망도 있다


정주진: 제도 종교 안에서는 여러 한계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미얀마 사람을 만났던 경험이 있는데 군부 독재 시절이라 아주 조심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디서든 감시당할 수 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가 다 알려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얼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요, 비공식적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려 하더군요. 그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피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봐야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외부인이 판단하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도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어느 정도 타협한 사례들이 있지요. 제 삼자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종교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폭력적 구조나 문화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안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안에서는 당위적으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의 정체성에 맞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종교 제도가 평화의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종교는 원칙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무기를 수입하는 것에 반대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잖아요. 


또 다른 이유는, 주류는 아니지만, 종교 안에서 제대로 된 평화에 대해서, 평화의 실천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환경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어요. 종교적인 영성과 결합을 해서 내가 종교인으로서 성찰할 부분과, 폭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제도권 종교가 게으르고 무지해서 제대로 사람을 교육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노력하면 사람들의 평화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리도 많아져야 하고, 각 종교 안에서 보편적 평화를 자기 종교의 평화와 어떻게 접목시키고 실천할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자리를 만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서보혁: 북한 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중국과 한국은 체제가 다르다. 중국하고 한국뿐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우리는 적대관계입니다. 이랬을 때 북한 교회가, 북한의 불교가 당의 통제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중, 남북 종교교류가 더 필요합니다. 공산당 통제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비판과 함께 그 국가 내의 종교단체의 위상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지원교류활동이 갖는 선교 전략적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일 사이에 있어서는 정치체제는 같지만 역사인식은 다릅니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 위상도 다른 면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사회자가 토론에 던졌던 이야기와 같습니다. 국가 간의 장벽이 있는데 종교의 보편성이 이를 어떻게 넘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저는 최소주의적 접근에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는 NO라고 이야기하고, 이 점에서 국가와 체제를 넘어서 지역·세계적 차원에서 종교와 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냐 하면 종교를 기준으로 했을 때 바깥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과 통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이익집단화 되는 경향을 종교 스스로 경계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종교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영접할 이유입니다. 


소유에서 존재의 근거로


원익선: 다 공감하고요. 결국은 이번 토론의 주제가 종교와 국가 및 폭력인데 국가는 지역성을 갖고 형성되었지만 그 지역의 선량한 백성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지향하는 것도 종교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인 평화, 우애, 정의, 생명, 인권 등의 핵심 가치와 동일합니다. 이처럼 보편적 가치를 당연히 국가가 지향해야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는 권력의 교체로 인해 항상 단절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정권의 성격에 의해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단절이 없습니다. 내가 종교를 믿는 동안 정권이 바뀔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어떻게 되든 그 보편적 가치는 종교가 반드시 담보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런 종교적 가치를 영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야말로 국가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대신 종교는 현실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이는 종교 내적인 민주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는 현실적인 권력을 가지되 종교는 정신적인 세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자기 절제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늘 종교는 결국 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신을 어떻게 제대로 계승하고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탈되는 즉시 자신의 원점, 자기 종교의 근본, 예를 들어 종조나 교조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재해석해서 자신의 고유한 가르침이 오늘날 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적 앞마당을 대중에게 늘 개방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종교는 우리 삶이 어떤 현실적 권력이나 물질적 소유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소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를 구현하는 데에도 국가가 일조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적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종교적인 연대를 통해 종교의 보편적 가치가 확산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에 국가 또한 수긍하고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동반자로서 진정으로 종교의 존재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찬수: 토론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래도 대부분 희망을 놓지 않고 계셔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지금까지 종교평화 토론 모임인 레페스포럼과 원음방송에서 기획한 신개벽포럼이 함께 종교, 평화, 국가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봤습니다. 각본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만, 하나하나가 소중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이런 종교 대화모임 있으니 좋다


▲ (사진출처=원음방송)


원익선: 오늘 대화모임에 참여하게 되어 행복하고 흐뭇합니다. 원음방송이든 레페스포럼이든 한국의 종교가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앞으로도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로운 한국, 평화로운 종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보혁: 한반도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 때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특별히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원음방송에서 오늘 같은 토론을 하게 되어 기쁘다. 이번에 촛불시민혁명을 통해서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인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한반도의 위기가 슬기롭게 해결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정주진: 무거운 주제라 보시는 분들은 지루할 것 같아 걱정되지만 우연이라도 이 방송을 보신 분들은 새로운 성찰의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와 각종 종교단체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 깊이 성찰하고 때로 의문까지 제기하면서 진짜 종교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와 공동체를 만드는데 작은 힘을 보태었으면 합니다. 


이병두: 대본을 늦게 받아 준비를 못했지만 도리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상당히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송 분위기가 앞으로도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인류 사회가 바르게 진보하려면 ‘자비와 정의’의 두 바퀴가 조화롭게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비가 없이 정의감만 넘칠 때에는 스탈린과 히틀러와 같은 독재 체제가 이루어지고, 정의감은 없이 자유 요구만 넘쳐날 때에는 사회가 무질서하게 될 수 있는데, 이를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것은 종교인들이 갖추고 있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을 같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찬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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