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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마음의 평화’ 위해 교회를 찾았다면
  • 지성용
  • 등록 2017-12-12 12:05:36
  • 수정 2017-12-12 14: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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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를 다듬은 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현대 한국사회는 물질적으로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생활은 더욱 편리해 지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답을 주저한다. 우리는 제도 교육을 통해서 수많은 정보와 지식 체계를 공부해 왔지만, 정작 중요한 우리들 인생 문제, 행복한 삶, 건강한 영과 정신, 고통, 죽음, 인생의 의미와 가치 등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적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이 잠들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썩어 있던 공직사회에, 파렴치한 자본주의 경제독재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 몰라’로 일관했던 대부분의 보통사람들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사의 원인과 진실규명에 대한 문제는 차치 하더라도, 선내방송을 통해 들려온 ‘가만히 있으라!’ 는 소리에 가만있던 많은 학생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외침 그대로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혀있다. 그러나 지독한 망각의 병에 걸려 이내 상처의 아픔을 잊었는지 “이쯤 하면 됐으니 이제 그만 말하라”는 이들에게, 정신분석가 정혜신 박사는 이렇게 되돌려 말한다.


▲ 지난 2014년 5월 3일,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의문이 들은 한 학생이 더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의 침묵 시위를 제안했고 이에 서울 곳곳에서 침묵 시위가 진행됐다. (사진출처=딴지일보)


끔찍한 일을 자꾸 떠올리면 마음이‘불편’해지니 고개를 돌리게 된다고도 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는 노이로제를 ‘건강한 불편함을 회피한 대가’라고 정의합니다. 직면해야 할 불편함을 회피한 결과로 얻는 것이 바로 정신적 질병이라는 거죠. 세월호 정국에서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괜찮을 거야, 나아질 거야…’라는 어설픈 자기최면으로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는 사람의 최종 종착역은 정신적 고통과 일그러짐이고, 직면해야 할 건강한 불편함을 ‘경기 침체…’ 운운하며 덮고 넘어가자고 꾀는 사람들은 질병 유발자 입니다. 이제 우리 더는 망가지지 않아야 하지 않겠어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처럼, 닭다리 뜯는 노인과 대학생들처럼 참혹하게 망가지진 않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가만히 있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적인 일들로 때로는 존재를 압도해 버리는 것 같은 큰 혼란에 직면 할 때가 있다. 말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저들의 침묵이 당연한 것인지, 저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지, 처세인지 혼란이다. 수많은 불의한 일들이 벌어지는 교회의 상황과 사건들 가운데서 침묵하고 회피하고, 남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마틴 니뮐러 목사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마틴 니뮐러 목사


교회 안의 모습을 바라본다. 교회는 예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살아야 하는 성사(sacramentum)인데, 지금 교회는 과연 얼마나 이 시대에 걸맞게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주교들의 모습에서, 사제들의 모습에서, 수도자들의 모습, 평신도들의 모습 어디에서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발견하는가? 의문을 던져 본다. 예수를 언급하지만 교회에서 예수는 실종되었다. 교회에서는 예수가 필요 없는 듯하다. 그 자리에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예수가 되고 마리아가 되어 버렸다.


장일순 선생님이 말한다.

  

이제까지 추구한 게 의미가 없으면 소리 없이 버려야 한다. 10년을 쌓았건 20년을 쌓았건 그게 모래성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허물 줄도 알아야 한다.


교회를 찾는 이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왔단다. 복음의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궁극적 목적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인가? 그런데 정작 예수는 ‘칼을 주러 왔다’,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가 주는 평화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다른 것인가? 


아무튼 예비신자는 교회 공동체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모인 ‘믿는 이들의 모임’에 나왔는데, 이곳은 어쩐지 더 삭막하고 더 고립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례와 견진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건만 복음의 기쁨은 사라지고 대신 의무와 책임, 건축헌금과 교무금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고요와 침묵은 사라지고 온갖 단체들이 난립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공동체에서 ‘생명력과 복음의 진정성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교회를 떠나간다. 사제들의 추문과 수도자들의 변덕, 사목회와 단체장들의 허위와 위선은 그 옛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보는 것만 같다며 이런 교회라면 그만 다니겠다 말하고 떠나가는 지식인들도 여럿 보았다.



기쁨이 없는 공동체, 환대가 없는 공동체, 만남을 거부하고, 더 이상 대화의 자리도 마련되지 않는 공동체, 사람들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기 두려워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누군가가 그 집단을 지배할 때,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외부활동으로 도피하려 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위험에 처해진다. 한 공동체의 건강함 여부는 뜻밖의 방문객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어떤 사람이라도 접대할 수 있는 능력, 구성원 상호 간에 드러나는 기쁨과 단순함, 공동체의 창조적인 역량 등이 주요한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교회공동체의 기쁨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느 본당에서는 1년 가까이 본당 신자들이 본당사제의 인사발령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고, 해당 사제는 미사가 끝난 후 성수를 뿌리며 ‘사탄아 물러가라!’ 기도한다. 교회는 어느새 분파와 파벌의 장이 되어 버렸다. 사제들 안에도 소위 ‘라인’이 있고, 성당 안에서도 전임 단체장들과 현 단체장들과의 알력과 긴장으로 본당 공동체의 분파가 형성되어 일치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분파’란, 오로지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폐쇄적이며 때로는 광신적인 성향을 갖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개별적인 성찰 노력이 없고, 타인에 대한 관찰과 비난만을 자신들 삶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결점이 없고,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의 원리를 보존하려는 자들이며 남들은 모두 잘못되었고, 불의하고, 경건하지 않고,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기 일쑤다. 겉으로는 기쁨과 여유, 평화를 지닌듯 하지만 그들의 속성은 이내 공동체의 위기 가운데 드러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과 공허, 외로움과 죄의식에 갇혀 우리 본연의 삶을 살아나가기 힘든 상황에 직면한다. 목표도, 의미와 가치도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인지, 사라진 것인 지, 세상을 뒤 덮고 있는 먹장구름이 우리를 단번에 압도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행복을 찾는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 그 분을 받아들이게 되면 삶의 기쁨이 다시 솟아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를 단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요한 3,16)을 믿어야 하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인격적 친밀함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영적 의미와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구도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누르고 얻는 행복은 피곤한 행복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작은 것과 약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가는 삶, 나누는 삶. 세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하느님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라는 진리를 마음에 담아 인내함으로 모든 세상의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복음(Good News)’은 ‘하늘나라의 오심(Basileia)’이다.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제1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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