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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1-12 18:51:51
  • 수정 2018-01-12 19: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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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1사무 3,3ㄴ-10.19) 해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부르심’(성소)에 관한 이야기들은 성경 가운데서도 자못 감동을 주고, 의미가 깊다. 아브라함(창세 12), 모세(탈출 3), 이사야(이사 6), 예레미야(예레 1)가 받은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 첫째 독서에는 예언자로서 부르시는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엘을 예언자로 부르시는 방법은 매우 은밀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사무엘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부족 사회에서 군주시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기 못 낳은 부인에게서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로서 태어나게 된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께 뽑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바로 잡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한 밤중에 잠을 자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서, 자기 스승 엘리가 부르는 줄로 착각한다. 인간의 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분간하고 듣는 데 얼마나 둔한가! 그렇지만 하느님은 끈질기게 젊은 사무엘을 부르고, 마침내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은 사무엘의 입속에 당신의 말씀을 넣어주어, 사무엘을 커다란 예언자로 만드신다.


사무엘은 주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응하고 착실하게 순종한다(19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불러 성소(거룩한 소명)를 맡기신다. 어떤 사람은 사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으로 부르신다(1코린 13,28).


각 사람은 가까이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자기가 처한 환경을 통하여 각각 독특한 성소를 받고 있다. 자기 아내와 남편, 부모 형제, 자식, 친구, 이웃, 직장과 모임, 직책에 따른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자기와 관계하는 주위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다운 사람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나와 내 주위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다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각자 자기 성소에 순응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인간과 인류를 구원하는 보편적 소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39) 해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앞에 있었고 당신 뒤에 올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안에 수렴하신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새로운 참된 대사제로서 새롭고 참되고 유일한 제사를 하느님께 바쳐 드린다. 제사를 바치는 목적과 의미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친교를 재건하는 일일진대,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을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본격적인 제사 자체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 당신 자신을 깡그리, 살과 피, 생명까지를 인간과 인류에게 바치셨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셨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받은 위대한 소명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받은 소명이다.


제2독서(1코린 6,13ㄷ-15ㄱ.17-20) 해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입니다>


코린토 신자 공동체 안에 만연된 탈선과 방종을 바오로는 사정없이 꾸짖는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는 말을 자유방종으로 곡해하여 음행까지도 정당화하려고 한다고 사정없이 꾸짖는다. 음행을 마치 배고플 때 밥 먹는 정도로 간주한다고 사정없이 나무란다.


바오로는 적극적인 논증을 편다. 바오로의 논거는 두 가지 확신에 기초를 둔다. 첫째, ‘성’이란 그저 단순한 욕구충족의 대상이 결코 아니며, 인격과 인격이 관계를 맺는 전인적(자기 전체의) 자기표현이요 자기전달이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의 몸과 마음 전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속량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그리스도의 분신이라는 것이다. 


‘성’은 결코 돈을 주고 농락하는 환락의 대상이 아니요, 성욕을 풀고 배설하는 물건이 아니다. 흔히 돈이 없어 많이 배우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일하거나 굴러다니는 사람일지라도 내 동생이나 누이와 똑같이 귀중한 인간이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 하느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인간, 즉 똑같은 내 형제자매다. 자기 누이동생을 범하는 자를 누가 가만히 두겠는가? 돈 없고 의지할 사람 없는 서러운 사람은 특별히 하느님이 마음을 쓰고 돌보고 계시는 사람이다. 하느님께 혼나지 않으려거든 모든 인간 특히 소외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와 내 형제자매로 대우할 일이다.


복음(요한 1,35-42) 해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보았다>


오늘 복음도 부르심(성소)에 관한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무슨 굉장한 사건을 수반하지 않고, 단순히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 앞에서 또다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고 예수를 증거한다. 서슴없이 천명하는 그 말에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을 하직하고 예수를 따르게 된다.


두 제자란 안드레아와 다른 한 사람(혹시 요한 복음서 저자 자신이 아닐지 모른다)을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를 즉시 따른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데 따른 근본적인 변혁은 선택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생목표와 처신과 운명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이 지닌 깊은 뜻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향하여 살고 움직이고 노력하고 고생하는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스승님, 어디 묵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에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 가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대하려고 노력하면, 반드시 그리스도 자신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으시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와 함께 지냈다’ 인간들과 함께 인간들 가운데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리스도와 함께 지낼 때, 우리 생애와 진로를 바꾸고 변형시키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두 제자 다음에 안드레아의 형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케파’라는 다른 이름을 지어 주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다. 이름을 바꾸는 일은 구세사에서 결정적인 ‘소명’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요소다.


묵상


주님께서 부르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 나서고, 우리 각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고 계신다. 특히 당신을 증거하는 증인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부르고 계신다. 그 부르심은 우리 온 생애를 바쳐 당신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성경에 소개되는 하느님은 숨어 계시거나 침묵하거나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거나 한사코 비밀을 숨기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 끊임없이 비추고,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다가오는 분이시다. 끊임없이 인간을 만나러 오고, 당신 자신과 마음을 인간에게 주려 하는 분이시다.


어느 순간 양심 깊은 데서 그분의 목소리가 울려나올 때,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분을 만나 뵈어야 한다. 그분의 거처와 그분의 말씀은 우리 한가운데 계신다.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가정과 직장과 모임과 국가와 세계 속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 그분이 현존하고 그분이 우리 각 사람의 양심에 대고 말씀을 건네고 계신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 ‘너희는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느냐?’ ‘스승님,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지만, 그런 하느님을 우리는 충분히 합당하게 맞아들인 적이 별로 없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먼저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선물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더라도 우리에게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깨끗이 치워진 빈자리, 겸허해지고 낮추어진 마음,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뽐낼 이유가 실상 아무것도 없음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채울 수도 없고 당신 것(소유)으로 차지하실 수도 없다. 하느님의 차지(자녀)가 되지 않고, 하느님 아닌 쓰레기 같은 욕망으로 채워진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갈 위험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지닌 가치는 온 인류를 위한 가치다.


인생의 근본 의미나 궁극 목적을 성실하게 추구하고 있는 사람의 고뇌와 노력은 그 어떠한 것이 되었든 반드시 결실을 얻게 되어 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 주려고 끊임없이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신자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건,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이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살고 간 사람이건 그 후에 태어난 사람이건, 진지하게 자기 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건네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신다.


진지하게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그 고귀한 만남은 그 개인만을 위해 베풀어지는 만남이 아니다. 그 만남은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온 인류에게까지 파급효과를 낳아야 될 만남이다.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분으로서, 그 말씀을 당신 안에 혼자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파하고 전달하고 나누셨다.


신앙이란 그저 듣고 받아들이는 데 그치고 말 선물이 아니고, 반드시 전파하고 전달하고 나누어야 할 사명을 지우는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났다면, 그분을 말과 생활로써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된다. 자기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내걸고 살아야 할 당위와 사명을 받게 된다.


이제 “우리 몸과 마음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 있다” 이제는 내가 내 욕심을 채우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당신의 염원인 인류의 합심과 구원을 위해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는 내가 내 자신의 영광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의 비워짐(겸허함) 안에서 당신 능력을 보이고 당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차지가 되고,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 몫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비워져 있고 겸허해진 우리 마음속을 그리스도와 당신 성령으로 채우고, 우리를 당신 도구로 삼아 온 인류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한 마음으로 묶는 데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하실 것이다.



연중 제2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1사무 3,3ㄴ-10.19)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시편(39)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   


제2독서(1코린 6,13ㄷ-15ㄱ.17-20)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형제 여러분,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복음(요한 1,35-42)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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