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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이를 이끌고 가는 장님 사내'
  • 전순란
  • 등록 2015-06-04 10:10:36
  • 수정 2015-06-04 12: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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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3일 수요일, 맑음


아침을 당겨먹고 어제 새로 사온 일회용 중국제 낫을 들고 앞마당 축대로 돌격! 아침 여섯 시! 보스코는 사다리를 들고 텃밭에서 축대로 기어올라가 작업을 시작하고, 나는 축대 위에서, 그러니까 휴천재 마당 철책에 매달려 작업을 시작했다. 일년에 한번씩 하는 제초작업이다. 제일 징글징글한 게 새삼, 환삼덩쿨, 거북꼬리, 도깨비방망! 할퀴고 찌르고 옷에 붙는 식물들을 보면 부화가 나서 전순란이 더 잔인해진다.


보스코는 “그 식물은 그렇게 남을 휘감아 오르고, 가시로 자기를 지키고, 옷이나 짐승 털가죽에 붙어서 씨앗을 퍼뜨리게 태어났다구! 하느님께 받는 습성대로 사는데 어쩌겠어?”라고 식물들을 변호해 주지만 나는 장갑을 이중으로 끼고 당기고 뽑고 자르고 베어내며 장장 여섯 시간을 씨름 했더니만 온 몸이 쓰라리고 결리고 지치고 쑤신다.


어제 부인에게 내가 장을 봐다 준 부면장님이 산보를 나온 길에 보스코의 사다리 곡예를 올려다보면서 “어휴! 교수님 떨어져요! 대사님 장사네, 장사!”하고 격려하신다. 여려 해 전에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분이어선지 70대 중반 보스코의 축대작업이 부러운가 보다.




‘천하장사 전순란 마징가 제트’인 나마저 이젠 보스코보다 힘을 못 쓰는 걸 보면 아침마다 한잔씩 마시는 홍삼물이 그의 건강지킴이가 되었나보다. 오늘 독서회에서 간호사나 한의원 조무사로 일하는 친구들 말로도, 홍삼은 장기복용을 해도 부작용 없이 면역력을 키워주는 유일한 영약이라니까...


마을 입구 한길가 서편에 ‘서강가든’을 하던 자리에 ‘새참’이라는 식당이 한 주ㅗ일 전 문을 열었단다. 도미니카1씨가 우리 부부를 그리로 초대하여 냉면을 시켰다. 마천으로 가는 오르막길 커브에 자리를 잡은 길목이어서 식당 간판을 보고서도 차를 세우고 들어서기가 힘들어선지 지난 10여년 몇 사람이 번갈아 장사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 문을 닫고 가버리는 곳이다. 


그래도 오늘은 제주에서 왔다는 주방장이 한데서 삶아 비벼주고 말아주는 냉면 맛이 괜찮았고 손님도 꽤 있었다. 보스코가 주인을 불러 어느 길목에 입간판을 세우면 좋겠다는 둥, 주차장도 마련하라는 둥 조언을 하는가 하면 “제발 좀 오래오래 하시오.”라는 축원도 하였다.


땡볕을 피해 샛길 그늘로 해서 마을로 돌아오다 윗말 당산나무 밑에 서각원을 차린 박경무씨의 집에 들러 차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둔, 젊은이치고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귀농자인데 우리가 이사오던 무렵 갓태어난 아기가 벌써 초딩 1학년이라니! 젊은 부부가 얼마나 아이들을 예의바르게 키웠는지 어른들 모시는 자세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세련된 아이들이다.


빨랫대의 저 많은 양말들과


창호문의 저 많은 구멍들은


이 가장 밑에 네 명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밝고 아름다운 표다


7시에는 함양 독서회 모임에 갔다. 이번에 읽은 “푹풍의 언덕”에 대한 독후감들이 어슷비슷했다. 하나같이 젊었을 때는 “나도 이렇게 미친 듯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였는데 지금 나이에는 “이런 미친 짓은 절대로 않겠다.”란다. 소설도 나이에 따라 감흥과 여운이 전혀 다른가? 그니들은 일제히 나에게 시선을 돌려 "어떻게 그런 질풍노도의 사랑을 했어요?"라고 묻는 표정들을 한다.


아침에 제초작업을 하던 중에 호천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집에 잠시 모셔온 엄마가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문턱마저 기어서 넘어가시더란다. 2주 전만 해도 보스코랑 손을 잡고 식당을 오가셨고 현관 장의자에 앉아서 “여름엔 (노인네들이) 여기 죽 앉아 있는데 겨울엔 각기 자기방으로 꼭꼭 숨고 말어.”라면서 정신이 또렷하고 사위와 대화를 하고 싶어하던 분인데?


아가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재롱을 하나씩 부리며 부모를 놀라게 하듯 노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잊고 놓치고 쇄퇴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식들을 놀라게 한다. 우선 유무상통에 있는 ‘대건효도병원’ 12인실에 딱 한 자리 남아 있다는 곳을 예약하고, 그곳에 계시면서 4인실로 옮기시든가 당신 방으로 옮기시게 조처하였다. 오늘 받아본 “우리詩” 6월호에서 홍해리 시인이 아내의 치매를 돌보면서 “눈먼 이를 이끌고 가는 장님 사내”의 처지를 절감하는 시구가 마음을 슬프게 한다.



백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

너무 머나멉니다

마음에서 몸으로 가는 길도

너무 힘듭니다

걱정에 젖어 잠이 오지 않고

근심으로 꿈이 산산 달아납니다

잠을 자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당신이 내게 무엇이었는가

나는 당신에게 누구였는가

생각하면 눈물부터 핑, 도는

바라보면 울컥해서 가슴만 아픈

오늘밤도 달이 뜨지 않는데

뿌연 하늘 아래

눈먼 이를 이끌고 가는

장님 사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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