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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3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3-02 17: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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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탈출 20,1-17 또는 탈출 20,1-3.7-8.12-17) 해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하여 법을 주셨다>


‘십계명’은 엘로이스트 전승에도 나오고(탈출 20), 신명기계 전승에도 나온다(신명 5,6-21). 십계명의 원래 형태는 13-16절처럼 아마 매우 간결한 명령형으로 외우기 쉽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가서 신학적 반성이 덧붙여져 엘로이스트 전승으로도 전해지고 신명기계 전승으로도 전해지게 된 것 같다.


십계명의 서두에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항상 하느님이 먼저 은총을 베풀고 선물을 내려주신다는 뜻이고,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도 반드시 먼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대한 체험은 결코 인간 자신의 어떤 자격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 마음에 드는 겸허한 사람에게 당신이 원하는 정도대로 당신을 체험하게 하고 당신 사랑을 부어주고 당신과 친교를 맺게 허락하여 주신다.


각 계명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 본다.


4절: 하느님의 상(像)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 금령은 다음 두 가지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분이며, 그래서 하느님은 단지 당신의 행동과 업적을 통해서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사실이 그 한가지요, 다음으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상(像)으로서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이 그 두 번째다(참조. 창세 1,27). 그러므로 이웃(사람)을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하느님의 상(像)에 대한 흠숭이 되는 것이다.


5절과 6절: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첨가된 부분은 예레 31,29-30; 에제18; 탈출 34.6-7에 나타나는 신학적 발전을 반영한다.


7절: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신 이유는 당신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네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지, 마술적 어떤 신통력을 끌어내리거나 어떤 사람을 저주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기 위해 불러대라는 데 있지 않다.

 

8-11절: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 유독 길게 언급된 것을 보면,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 안식일 규정이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에 사용된 동사는 ‘약혼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안식일에 그 약혼이 성립되었음을 찬양하는 찬미가를 금요일 저녁에 노래 부른다(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여성 명사이다).


“오라, 내 친구여 - 서로에게 말한다. - 약혼녀를 만나러 오라. 다가오는 안식일을 맞이하자!”


12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공경하다.’ 라는 동사는 부모란 자녀들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도구 역할을 착실히 수행할 책임을 지니고 있음을 통감해야 하며, 자녀들 역시 부모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여겨 공경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노라면, 설령 잘못된 길로 빠졌다가도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와 그 분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시편(18) 해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나이다.


‘주님의 법’이란 단순히 십계명을 가리킨다기보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계시(啓示)를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에게 ‘주님의 법’은 토라(모세오경)를 가리키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토라를 완성시킨 분이고, 인간이 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 계시(啓示)이시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겁낸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셔 충성스럽게 섬긴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합당하게 ‘경외한’ 분이시다.


제2독서(1코린 1,22-25) 해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설파한다>


그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힘으로 보인다.


히브리인들이 지녔던 믿음의 핵심에는 하느님의 말씀과 주님의 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믿음의 핵심에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고 계신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코린토 신자들은 베드로 아니면 바오로 사도에게 편향되게 기울어져 있었으며, 또는 아폴로 같은 뛰어난 웅변가에게 기울어지기도 하고(참조. 사도 18,24이하), 그것도 아니면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네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여기기도 했다(1코린 1,10-12).


그런 판국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신앙의 핵심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자칫 비위에 거슬리거나 어리석게 보일 염려가 있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살해당하셨다는 사실이 비위에 거슬리고 어리석게 보일 염려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볼 때, 그런 주장은 한없이 어리석게만 보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눈에도 그런 믿음은 몹시 비위에 거슬렸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고통 받고 압박받는 사람들 위에 눈길을 쏟고 계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고 계신다고 굳게 믿던 그들은 영광 중에 싸여 오셔야 될 메시아께서 그런 비참한 운명을 당하시리라고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히브리인들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고, 박해받는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고 생각했고, 이사야가 주님의 종에 관하여 노래한 것처럼 수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 격이라고까지 생각했지만, 그런 꼴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이 ‘오셔야 될 그 분’이리라고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는,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단하게 그저 하나의 ‘기적’으로 간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를 위해 쏟으신 그분의 피 속에 우리의 생명이 들어 있음을 입증하고 보증하고 실현하기 위한 부활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반항과 거역을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해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보아 용서해 주신다. 그리하여 창세 2,17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이전에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 ⓒ 문미정


복음(요한 2,13-25) 해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첫 번째 파스카((과월절)에 일어난 이 일화는 예수님의 세 번째 파스카 곧 십자가의 파스카를 예고하고 비추어 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을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는 공관(共觀) 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공적 직무를 수행하신 시초부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요한 1,19-2,12).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라 3,1-4의 예언을 실현하고 계심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말라 3,1-4에는 전령(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온 다음 곧 바로, 주님(즉, 주님)이 당신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 정화작업을 하시리라고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요한 복음서는 구약의 주님과 나자렛 예수를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16절)은 즈카 14,21(“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서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17절에서는 요한 복음서가 시편 69,10의 본문(“하느님이시여,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있나이다.”)을 인용하는데, 그 의도는 성경의 말씀이 십자가로 인하여 충만히 실현되었음을 드러내려함이 분명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주님의 성전을 위하시는 열정에 ‘불살라질’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고 당신 자신을 먹어야 할 음식으로 제공하실 것이다(이 점은 6장에서 두 번째 파스카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서, 오늘의 복음에서 적어도 두 가지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에 관한 것이다. 13-21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완수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한 다음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상기하고서 비로소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2절)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성경의 말씀을 온전하게 몸소 살고 가신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폐지하지 않고, 구약에 아무것도 덧붙이시지 않았다. 다만 구약을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을 따름이다.


둘째는, 성전 즉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장소에 관한 것이다. 19절 이하에서 성전은 예수님의 몸과 동일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몸소 결정적인 파스카의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참조. 1,29). 그리고 ‘성령을 쏟으신’ 당신 죽음으로써(참조. 19,3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기 때문이다(참조. 6,40). 그 영원한 생명을 오늘날 우리가 성찬의 빵(한 식탁에서 똑같은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생명의 친교를 맺음)을 통하여 나누어받는다.


이상 두 가지 주제는 상호 긴밀하게 연관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성전은 역설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예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성전이 없고,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묵시 21,22)


묵상


보아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만든다.

파스카(건너감)의 윤리


사순절 동안 우리가 읽게 되는 독서들은 그리스도교 입문에 관한 큰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니, 그 소재들이란 세례, 신앙, 애덕, 새로운 생명 등이다. 물, 빛, 치유, 부활 같은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안에 이룩한 새로운 실재(實在)를 더욱 깊이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오늘 읽은 세 독서도 이 ‘바뀜’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윤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탈출기에 의한 제1독서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내려주신 법률을 제시하고 있다. 그 법률과 계명들은 저절로 생겨난 윤리 규범도 아니요, 하느님이 강제로 덮어씌운 명령도 아니다. 오히려 그 계명들은 인간으로 창조되고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부합한 요청이요, 그 소명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되찾은 소명이다. 그 계명들은 실정법이라기보다, 자연법의 성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계명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일으켜 세우신 고마운 의도로부터 연유된 요청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 역시 마찬가지로, 결코 인간적인 지혜가 짜낸 결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속하게 되었다는 본질적인 사건으로부터 연유된 요청이다.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되는 윤리적 요청은 ‘하느님의 어리석음’ 곧 그 분의 사랑에 찬 계획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단언한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생활은 예수를 철저히 본받음이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에 더 깊이, 더 완벽하게 참여해 가는 과정이다.

 

변혁을 일으키는 사건


그렇다면, 오늘 읽은 독서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 복음서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증표는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당신이 보내신 한 인간, 즉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장소요,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맺어진 참된 계약이요,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법률이요,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시이며 보증이시다.


그러면, 그 표시가 어떤 방법으로 나와 개인적으로 관련이 되며, 어떤 방법으로 나의 구원을 이룩해 주는가?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이다. 세례는 죄와 그 죄벌을 없애 주는 소극적인 무엇만이 아니다. 그보다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보이고 이루어 주는 적극적인 본질적 사건이요, 성령께서 개입하여 우리를 변형시켜 주시는 적극적 사건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결단을 내리는 순간마다, 다른 인간과 사회와 맺는 관계마다, 죄(이기적인 삶)에 죽고 참 생명(능력과 재물과 정을 나누며 함께 사는 삶)으로 다시 살아나는 세례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생명과 삶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실현되고 활동하고 있으며, 어느 날엔가 세례의 과정을 달성한 정도, 성령을 받은 정도, 하느님 자녀다워진 정도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나를 통하여 살아가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모든 인간)를 통하여 당신의 삶을 세상 끝 날까지 이어나가셔야 한다. 나(모든 인간)를 이끌어 끊임없이 죽음(불의, 미움, 싸움, 전쟁)에서 생명(정의, 용서, 화해, 일치)으로 건너가도록 하셔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를 따르고 닮아야 한다.


“우리 스승께서는 멸시를 받으셨다. 따라서 그 종은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스승께서는 가난하셨다. 그러므로 그 종은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스승께서는 손수 노동하며 연명하셨다. 그 종도 금리(金利)로 살거나 놀며 살아서는 안 된다. 스승께서는 도보로 여행하셨다. 그 종은 말을 타고 여행할 수 없다.


스승께서는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힘들게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사귀셨다. 그 종 역시 고관백작들과 사귈 수는 없다. 스승은 일꾼으로 자처하셨다. 그 종 또한 위대한 인물로 자처해서는 못쓴다. 스승은 백방으로 수모를 당하셨다. 그 종 어찌 칭찬만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스승께서는 험하게 입고, 박한 음식에다가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사셨다. 그 종 역시 좋은 옷, 맛있는 음식, 훌륭한 저택에서 생활해서는 안 된다. 스승은 힘든 노동을 하셨으며, 피로에 지쳐 계셨다. 그 종 또한 안일한 생활에 젖어들 수는 없다. 스승은 언제나 작은 자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종 또한 위대하고 큰 인물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샤를르 드 푸꼬)


사순 제3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탈출 20,1-17)

모세를 통하여 법이 주어졌다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또는 탈출 20,1-3.7-8.12-17: 위 독서에서 괄호 ((  )) 안의 것은 생략할 수 있다.


시편(18)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나이다


제2독서(1고린 1,22-25)

우리가 선포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지혜이다.


형제 여러분,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절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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