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2014년 세월호는 안개주의보 때문에 2시간을 늦게 출항했다.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배는 위험한 맹골수로를 선택했다. 배는 1994년 6월 일본에서 첫 취항했던 배로, 2009년 MB정부가 관련법시행규칙을 고쳐 규제를 완화하면서 제한 선박연령 (20년)을 개정하지 않았더라면 수명이 2개월 밖에 남지 않은 고물 선박이었다. 그러나 선박의 제한수명을 30년으로 연장해 주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사고 직후 선원들과 선장은 탈선했다. 승객들을 모두 배에 남겨둔 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하고, 본인들은 재빨리 구조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재빨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눈과 귀를 꽉 닫고 입을 다물고 있는 모순적인 신중함을 선택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1970)에서부터 여수 남영호 침몰 사건 (1970),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1971), 이리역 폭발 사고(1977), 경산 열차 추돌 사고(1981),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사고(1993), 구포 열차 전복 사고(1993), 서해 훼리호 침몰 사건(1993),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1994), 성수대교 붕괴 사건(1994),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1995), 칼기 괌 추락사고(1997), 씨랜드 참사(1999), 대구 가스 폭발 사고(1995), 인천 호프집 화재 사고(1999), 대구지하철화재 사건(2003) 등등 우리의 기억은 온통 검은 죽음들로 점철되어 있다. 2014년 초만 해도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로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깔려죽지 않았던가! 이것은 인재, 사람이 만든 재앙이다. 우연한 사건 사고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재앙이다.
앞서 열거한 모든 사건과 사고, 대형 참사들은 자본의 이윤추구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윤추구, 가치증식은 경영자가 추구하고 있는 종국의 목적이며 이윤추구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주도적 측면이다. 경영자가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지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만들어낸 가치(상품가치)와 노동력의 가치(임금) 사이의 큰 차액이 경영자에게 돌아간 결과다.
예를 들어, 삼성에서 신형 스마트폰을 만들어 100만 원에 팔아도 노동자의 임금은 그 가운데 1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기업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서 판매 될 때까지의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하지 않은 경영자의 이윤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경영자가 앗아간 잉여가치를 다시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자본축적이다.
노동자가 새로 만들어낸 가치 가운데에는 노동자 자신을 급양하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유지하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경영자를 급양하고 경영자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충당되는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영자가 노동자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로 노동자가 경영자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자세하고 완벽한 분석을 제공하는 일이 교황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시대의 징표를 아주 꼼꼼하게 살펴볼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날의 현실 가운데 일부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비인간화 과정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명확하게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될 수 있는 것과 하느님 계획에 반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움직임을 알아보고 식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한 영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영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복음의 기쁨』 51항)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노동력 공급은 절대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기계화와 기술진보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키고 다른 쪽에서는 값싼 해외 노동인구가 유입되면서 노동력 공급이 절대적으로 증가한다. 도시이주 농민, 여성과 아동, 88만원 세대의 청년실업자들과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상대적 과잉인구가 된다. 그 인구가 자본의 노동력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잉 경향’이라는 것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상의 상대적 과잉인구 이외에 생활보호나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매우 가난한 대중이 있다.
공장문 밖에는 몇 천 몇 만의 실업노동자가 넘쳐 나며, 해외에서 밀려들어오는 값싼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잠재적인 노동 인구는 더욱 많아진다. 경영자는 이것을 빌미로 업체의 노동자를 강제해서 임금을 인하할 수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경제는 경쟁과 생산의 무정부상태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생산은 항상 비약적인 축소와 확대가 뒤따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노동’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생산물에 자기를 대상화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 노동은 인간의 합목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며, 인간과 자연간의 과정으로서 인간이 자기 고유한 행위를 통하여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조절하는 과정이다.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로써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연장으로 노동을 통해 하느님과 합일되고, 하느님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가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노동이 그만큼 숭고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의미한다.
연대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사유 재산에 앞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입니다. 재화의 사적소유는 그 재화를 보호하고 증진하여 공동선에 더 잘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 정당화됩니다. 따라서 연대는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결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연대의 이러한 확신과 실천이 이루어질 때에 구조적 변화의 길이 열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확신과 태도가 생겨나지 않은 채 구조만 바꾸면 그 구조는 오래지 않아 부패하여 억압적이고 비효율적인 구조가 될 뿐입니다. (『복음의 기쁨』 189항)
그런데 현실 생활에서 보면 노동은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고 있고, 하느님 창조사업의 연장으로써의 고유한 가치는 의심 받고 있다. 그 동안 신학이 책상 위에서 노동의 고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자본주의하의 실제 생활에서 노동은 끊임없이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치경제학의 도움을 빌어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볼 때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정치경제학에서는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기본모순으로 상정한다. 즉, 경영자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더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는 자신들의 권리와 노동의 가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조직적으로 경영자들에 대항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방법으로 노동자와 경영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결국 이 대립은 새로운 상황으로 지양(핵심은 보존, 오류는 폐기)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 계급관계의 설정은 이제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 진화되고 있다. 이제 외부의 강제에 의해 노동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현대사회는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개인의 스펙을 강제하여 자신의 노동상품을 팔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신학은 뭔가 할 말이 있어야 한다. “전통적인 의미에 의하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신앙인답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 인간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는 협조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학은 ‘해석학’이라고 말한다. 신학은 이러한 노동과 자본의 첨예한 대립의 한 가운데에서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과연 그 싸움의 명분이 정당한가를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혹시 정의가 불의에 의해서 억압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의인이 악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왜곡되고 있지는 않은지를 밝혀내어 하느님의 뜻이 왜곡되고 있다면 일꾼으로서, 사도로서 불의한 상황에 대해 예언자적 목청을 돋구어야한다.
만일 명백히 선이 악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다면 여기에서 중립을 지키는 자는 악에 동조하는 자이며, 하느님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하느님은 선이시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만연된 즉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편이 아닌 노동의 편에 서서 노동을 소외시키는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항하는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그 악의 세력에 맞서야 한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삼성이 그 동안 저지른 온갖 악행들을 지금여기에 열거하기는 힘들다.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한 부를 축적하고 국민연금이라는 공적자금을 통해서 자신 일가의 경영승계를 완성하려한 삼성. 중소기업이 피눈물을 흘리며 개발한 기술을 날로 삼키며 기업사냥을 하던 삼성. 그런데 어떤 사제들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종교문제를 책으로 써서 팔아먹는다. 여기에 교회 위기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과 삶의 양식을 이어 받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의 삶을 이해하며 예수처럼 헌신하고 자유인의 자세를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존재로서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는 작은 지역에서 꼬물거렸지만 그 울림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멀리 대한민국에까지 퍼져 우리들 마음을 둥둥 울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