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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의 경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 지성용
  • 등록 2018-04-09 12:45:26
  • 수정 2018-04-17 11: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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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7년 4월에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신자유주의 경제는 1970년대 동유럽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의 19세기 고전 경제학자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 에 근거한 ‘정부가 개인의 권리와 사적재산권을 보호’하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대변하며 등장했다.


F. A. 하이에크 (1899~1992)는 그의 저서 『노예의 길』에서 2차 대전 당시 독일 등을 중심으로 번져간 집단주의와 전체주의 흐름을 보면서 자생적인 발전 동력을 집단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인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자유의 원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진보는 경쟁을 극대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국가도 이러한 경쟁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경쟁보다 더 열등한 방법들이 경쟁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경쟁이 대개의 경우 알려진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권력의 강제적이고도 자의적인 간섭 없이도 우리의 행위들이 서로 조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경쟁을 우월한 방법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을 통한 진보는 개인의 성과와 생산성은 높일 수 있지만, 그만큼 불평등은 심화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이들이 많이 발생하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양산된다. 경제가 성장하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로 인해 소득불평등이 완화될 것이라는 견해들이 무색하게 경제는 성장했지만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어왔다. 앞서 언급한바 삼성이 수 조원의 영업이익을 낸다 해도 삼성반도체에서 직업병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산재 판정도 받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몰리고 노동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낙수효과가 아니라 낙수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는 구조의 불평등을 설명할 뿐이다.



2010년 대기업 총수가 제 회사 직원들 앞에서 자기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노동자를 한 대에 100만원씩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때렸다. 그 노동자는 자기 트럭을 가진 사업자이지만 실재로 ‘특수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다. 기업총수는 노동자의 탱크로리와 맷값으로 7000만원을 지급했지만 며칠 후 7000만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했다. 기업의 총수가 자기 아들이 매 맞은 것에 대한 복수로, 사람을 시켜 폭행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자본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군사독재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 의심스러울 뿐이다. 정치적 악행에는 국민들이 강력히 저항하는데 경제적 악행에는 특별한 저항이 없다. 그저 불매운동 정도가 전부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왜 정치적 의식과 더불어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일까?

  

1997년 구제금융사태 이후 자본이 국가(정부)를 누르고 주인이 되는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읽어내지 못한 우리들의 무지가 있다. 현대, 삼성, SK를 욕하면 잡혀가지는 않는데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대기업에 우리 자녀들을 입사시키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 집안에서 대기업에 다닌다 하면 이것은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누군가는 부러워한다. 우리는 그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하는 것이다. 부당한 노동과 임금으로 고통 받고, 해직과 실직으로, 청년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공부하지 않고, 경쟁에서 뒤진 그들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린다. 스펙을 쌓지 못하고, 외국어 시험을 준비하지 못한 그들의 문제로 몰아간다. 하지만 불경기 가운데서도 수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대기업들은 과연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낙수효과’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수효과 이론은 자유경쟁 시장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성 정책과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옹호하는 행태들을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소외된 이들은 여전히 낙수를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는 생활 방식을 유지 하는 것이, 또는 이기적 목표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54항)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느님을 만난다.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채, 성전만을 보고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즉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개인 정화와 사회구조의 정화가 필요하다. 각 개인의 정화도 중요하지만 나약한 인간본성을 보완하고 대체할 사회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잘못된 사회구조, 정책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불고지죄 안에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개인의 경쟁을 강조하는 교육 현실 속에 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 사회 기득권자들은 사회구조문제에 침묵하기 위해 개인윤리를 강조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최고기업 삼성반도체 현장에서 12명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삼성반도체는 ‘무노조경영원칙’을 내세워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고 백혈병 환자에게 사직서를 강요하는 등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삶의 가치조차 빼앗아 가고 있다. 


이에 대해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1986) 에서 “인류가 경험한 초유의 풍요가 도리어 인간의 일상적 인식능력과 통제수준을 삼켜 버릴 정도로 재앙의 근원이 되었고, 자유주의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사실상의 강제의 결과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경쟁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실패와 좌절도 많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고, 지친 마음 을 ‘힐링’ 하려고 한다. 그런 곳에 사람이 몰리고 무조건적 성공, 무지갯빛 미래를 말하는 책과 강연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대형 종교시설도 이 때문에 생겨난다.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던 무자비한 과거(탈출 32, 1-35)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돈’이라는 우상으로, 참된 인간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로 나타납니다.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는 그 경제적 불균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신의 필요 중 하나를 충족시키려는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필요란 바로 더 많은 소비입니다. (『복음의 기쁨』 55항)



위로 받고 다시 자본의 전쟁터로 나가 싸워 더 많은 성과를 올리면 더 많은 기부로 이어지고 교회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형종교 시설일수록 경쟁사회, 성과사회,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막강한 자본의 지원군이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느님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먹사 문제’가 되면 면죄부가 발급된다. “어쩔 수 없지! 먹고 사는 문제인데…”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아주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모두가 고용의 안정성과 항상성, 임금의 적정성을 유지해야 사회가 안전하고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이다.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고 안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를 호락호락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있다.


아우슈비츠 학살의 기획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끝까지 유대인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는 그의 죄를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세 가지 무능을 언급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 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중앙)


그리고 “세 번째의 무능성은 곧 ‘판단의 무능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아렌트는 이해한다. 결국, 아이히만의 가장 큰 죄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이라고 판결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공동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이제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임을 바라보도록 시대의 징표를 끌어안고 용기 있게 세상에 외쳐야 한다. 앞서 살펴본 대형 사건들에 공통적인 것은 사람이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많이 죽어서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인재, 관재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들 이었지만 ‘돈’의 논리가 그 예방과 처치를 올바로 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1%와 99%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이 지루한 싸움이 계속해서 99%의 패배로 끝난다는 데에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징표는 ‘돈’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 사회 초극의 고난과 신자유주의로의 출구전략 혼란으로 경제활동 가능자들이 종속적 ‘갑을 관계’ 안에서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들은 과연 지금 의심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행동하고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진정한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기억하자. 이웃은 우리이지 타인이 아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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