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장준하 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영향을 받고 58세에 역사 한복판으로 뛰어든 문익환 목사.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문익환 목사는 목숨을 걸고 1989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끌어안고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입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분단 70년이 흘렀지만 지난 4월 27일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 판문점선언을 이끌어냈고 한발 더 평화에 가까워진 지금,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통일의 집’은 더 뜻 깊은 장소가 됐다.
지난 1일,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통일의 집’이 박물관으로 새 단장했다. 통일의 집을 위해 많은 시민들의 정성이 모였다. 이날 통일의 집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최창환 사단법인 통일의 집 이사장은 통일의 중심이 되는 시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큰 발전을 이루겠다면서, 이 집이 후대에 통일의 산실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통일의 집은 문익환 목사와 가족이 1970년부터 24년 동안 살던 집으로, 문 목사는 24년 중 11년 3개월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가 눈을 감은 후, 그의 동반자 박용길 장로는 이 집이 통일을 위한 토론과 교육의 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일반에 공개했다. 2013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2011년 박용길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역사가 담긴 유물 2만 5천여 점이 방치되자, 통일의 집 보존과 박물관 건립을 위한 모임이 2015년도부터 꾸려져 2016년 사단법인 통일의 집이 발족했다. 그 이듬해인 2017년에는 김상근 목사, 지선스님, 이창복 6·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해동 목사, 한명숙 전 총리, 함세웅 신부를 중심으로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모임이 시작됐다.
문영미 통일의 집 상임이사는 경과보고를 하면서, 지난 4월 5일 착공식을 했고 건축 목표를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당시 집의 모습과 가장 가깝게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고 설명했다.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바른 역사로 자리 잡을 수 없다.
이해동 목사는 “만약 우리가 문익환 목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분명 그 민족사는 그릇된 역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모든 그의 행적이 오늘 이 집을 통해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앞서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예배가 열렸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축전을 보내, “문익환 목사는 분단의 역사를 끝장내기 위한 통일재단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통일 애국인사였다”고 말했다.
문익환 목사의 염원은 4월 27일 판문점선언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면서, “여러분들이 문익환 목사의 유지를 이어 판문점선언 이행에 앞장섬으로써, 북과 남이 하나 되는 통일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사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과 명분을 다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
문익환 목사와 동시대에 민주화 운동에 함께한 함세웅 신부는 에제키엘 예언서 이야기로 문익환 목사를 회상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해가 지중해보다도 더 아름다운 바다, 물고기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꿨다.
함 신부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문학적·신학적 상상력, 신학적 믿음과 확신을 가진 분이 문익환 목사님이었다”면서, “목사님의 상상력과 신학, 꿈과 희망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예배에는 문익환 목사를 기억하기 위해 2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했고, 이들은 기념예배가 끝난 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통일의 집으로 이동해 개관식도 함께 했다. 통일의 집은 주중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토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