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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그 본질적 기능 회복을 위하여 -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29
  • 지성용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8-06-25 12:28:50
  • 수정 2018-06-26 12: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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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7년 4월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종교와 사회변화의 문제를 다루는 과거의 학설들은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 입장은 마르크스적 전통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데 이것은 종교변화를 종속변수로, 사회변화를 독립변수로 보는 관점으로 사회의 어떤 변화가 발생하면 그 여파로 인해 종교변화가 따른다고 보는 입장이다. 종교가 사회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경우에도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회변화를 자극하기 보다는 그것을 방해하거나 억제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은 사회질서나 제도를 유지, 통합하는 것이지 결코 변화나 개혁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입장으로는 막스 베버적 관점이 있다. 베버는 사회변화가 종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일단 종교 안에 발생한 변화는 사회변화를 촉진시키는데 하나의 독립변수로 작용 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종교가 사회변화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사회에 영향을 주어서 그 변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영향의 방향이 일방적이었다고 보는 반면에 베버는 쌍방적이었다고 보았다는데 그 차이가 있다. 베버는 사회변화를 촉진시키는 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와 달리 오히려 사회변화를 억제하고 방해하며 기존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만을 하는 종교가 있다 생각했다.


구조적 접근을 시도하는 학자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사회분석에 있어 중요한 점은 역사적 블록, 헤게모니, 이데올로기 그리고 유기적 지식인 등이라고 말한다. 그람시는 어떤 계급도 폭력만을 통해서는 지배를 계속할 수 없으며 언제나 자신의 유기적인 지식인과 이데올로기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 자본주의 체제 피라미드. 위에서부터 돈-왕,자본가,귀족-성직자-경찰-쁘띠 부르주아-노동자


종교지식인과 지도자들이 하나의 역사적 블록 안에서 지배계급을 지지하면서 종교의 역할은 보수적이고 통합적이 되지만 피지배 계급이 성장하고 부상하여 계급관계가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부상하는 계급과 제휴하며, 그들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경우에는 종교의 역할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종교는 사회변화를 촉진하게 된다. 그람시에 의하면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제휴하려고 선택하는 계급과 그 제휴의 강도를 다지려는 노력들에 대하여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사회변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갖는 경직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지도자와 지배계급의 관계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불변적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종교이론은 사회개혁을 지향하면서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현대종교인들의 활동을 설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달리 베버는 종교가 오로지 사회변화를 억제하고 방해한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변화에 대한 종교의 역할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억제하는 종교가 있는 반면에 촉진시키는 종교가 있다고 보았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출현에 관한 세계 종교인들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단순히 욕심이 아니라 미래의 이득을 기대하면서 시간과 재산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투자하는 행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정치경제적 조건들이 있어야 했지만 우선 특정한 태도 가치관과 아울러 동기를 가지고 기업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개인들을 산출해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사회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슬픔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인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확실히 국가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핵심임무 이지만,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183항)


베버에 의하면 사제는 종교나 사회의 기존체계에 대하여 도전하고 비판하지 않는다. 반면에 예언자는 사제와는 전혀 다른 종교지도자다. 예언자의 특성은 권력자에게 대항하고 기존제도를 비판하면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변화를 말하기도 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자극하며, 그를 통해 변화를 지향하는 운동에로 이끌어 간다. 이것을 보면 베버는 모든 종교에서 예언자가 출현 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종교가 어느 경우에는 사회변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고찰하면 베버는 특정한 종교에서는 그 사상의 정향 때문에 사회변화를 야기하는 예언자가 출현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와 정치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는 경우에 종교는 사회변화를 촉진하고 나아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예속시키려는 위정자들의 다각적이고 치밀한 전략들 때문에 세계종교들은 정치에 별로 도전하지 못했고 기존체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장기간 수행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적인 상황에서 종교가 비판적이고 도덕적인 자세를 취할 것인가?


▲ 2016년 11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5.18기념성당에서 시국미사 봉헌 후, 다함께 금남로까지 행진을 했다.


브라질과 칠레의 경우에서처럼 교회가 직면하는 위기가 크고 동시에 대응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할 때에는 교회의 진보성향이 높아진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에서처럼 교회가 직면하는 위기가 비교적 약하고 동시에 대응에 필요한 자원이 넉넉할 때에는 교회의 보수성이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결정적인 쇄신을 도입하며 그것은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의 제도화에까지 진전 할 수 있다. 곧 종교는 어떤 제도의 필연성과 불멸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그것이 단순히 역사의 산물이고 인간의 죄악이나 탐욕의 결과임을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는 신학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신학의 장소에 대한 이해가 너무 협소하여 그 범위가 책상, 강단, 성직자안에 머물러 있었고 한번 발설된 계시의 해석, 그리고 교도권 권위의 배경으로써의 역할에 머물고자 하였다. 이제 신학의 장소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새로운 정의로, 새로운 신학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알로이스 피어리스(Alloys Pieris)는 아시아의 해방신학을 이야기하면서 의미심장한 문제를 제기한다.


신학자들은 (아직까지)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신학자가 아니다.


이제 신학자는 하느님 백성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행동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해 내야 한다. 이제 신학은 학자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 속에서 삶으로 표현 되어야 한다. 신학은 민중의 삶과 관계가 없는 저 멀리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신앙인의 발밑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어둔 밤 항해를 이끄는 별빛이어야 한다. 


신학은 세상이 움직이는 ‘작용’으로서의 위치를 가져야 한다. 신학은 지키는 보루가 아니라 밀고 나가는 힘과 운동의 핵이다. 신학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이다. 분명 우리의 신앙은 기복이 아닌 하느님 창조사업의 동반자로서 인간자신의 인식과 실천 (응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브라질 국민, 특히 권리를 침해당한 채 빈민지역과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땅도 집도 먹을 것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곤경과 슬픔에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가난을 보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아는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불의한 분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분노합니다.” (191항)


우리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위한 양식이나 ‘품위 있는 생계보장’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복지와 번영도 바랍니다. 이는 교육, 의료혜택, 무엇보다도 고용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바로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참여적이고 연대적인 노동을 통하여 삶의 품위를 드러내고 드높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임금은 노동자들이 보편적 목적을 지닌 다른 모든 재화에 적절히 접근할 수 있게 해 줍니다.“ (192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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