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평론은 건조한 어투에 현학적인 편이다. 자기가 이만큼이나 알고 있다며 뽐내려 쓴 글 같을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어렵기도 하고 좀 쌀쌀맞은 글쓰기라는 느낌이 들어 굳이 찾아 읽지 않는 분야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신형철의 글을 보며 아, 평론가가 이렇게도 쓰는구나 했다. 이번에 펴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지난 7,8년 간 <한겨레21>,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다듬어 묶었다고 한다. 저자의 본격적인 평론과는 결이 좀 다르지만 여기 담긴 글들 역시 촘촘하고 분명하다. 깊으면서 따뜻하다.
읽는 내내 이이는 오래 고심해서 아주 솔직해진 글자를 고른 후 낱말 하나하나에 마음을 박아 정성스레 문장을 짓나보다 생각했다. 슬픔을 주제로 한 글뿐 아니라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사회와 문화에 대한 예리한 시선들도 예사롭지 않다. 저자가 예로 들거나 추천하는 책을 리스트로 만들어 야금야금 읽고 싶다.
그가 이제 슬픔을 공부하겠단다. 이 말에 꽂혔다.
“아이들이 가라앉는 걸 본 이후 한동안 나는 뉴스를 보며 자주 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로워 피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눈물도 멈췄다.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 우리는 병실에서 껴안고 울었는데 울면서도 나는 아내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으로부터도 아내보다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p.8)
영화 <킬링 디어>(요르고스 란티모스, 2017)를 예로 들며 사람의 심장은 주인을 위해서만 뛸 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타인의 몸속에선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음을 토로한다. 당연히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공감할 수 없다. 이건 사람이 가진 한계다. 그런데 신형철은 이것이 사람의 한계란 걸 인정은 하지만 긍정까지는 못하겠단다.
왜냐면 사람은, 그런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그런 한계를 슬퍼하면서 바로 그 슬픔을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아무리해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시도해도 실패할 걸 뻔히 알지만 그래도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한다.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이 비참함. 이 비참함에 진저리를 치면서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단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p.28)란다.
냉철하고 솔직하게 인간은 결국 자기밖에 몰라.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미안해. 여기서 그냥 끝낼 수는 없겠단다. “아마 영원히 모르겠지. 그렇지만 알려고 노력할게”라 말하고 말한 대로 노력하는 태도만으로도 상대방은 힘을 얻으리라는 거다. 사회 속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고.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걸 긍정하는 냉소적 태도가 어쩌면 더 간단하고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해도 한 번 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불가능하더라도 거기에 계속 가닿으려는 노력이 바로 공부라면서.
그래서 이 슬픈 공부는, 슬픔에 빠진 타인에게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며 거기서 어서 빠져나오라 훈계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다. 진짜 위로는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가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고 그러려면 정확히 인식해야만 한단다. 그러면서 『슬픔의 위안』(현암사, 2012)을 소개한다. 예컨대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어서 밖에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라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가만히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모두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모마일 차를 마셔보라는 친척의 말 따위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에게는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p.39-40)라고 요청하란다.
그러고 보면 내 딴엔 위로랍시고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슬픔을 견디느라 애쓰는 당신을 더 힘들고 피곤하게 했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슬픔에 빠진 당신을 위로 해야겠다싶으면 당신의 슬픔을 정확히 알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래봤자 슬픔에 빠진 당신보다야 덜 슬플 게 뻔하고 아무리 당신을 알려 해도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왜? 그래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으니까. 사람이라면 응당 누구나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니까.
그럼 나는 과연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p.176-177)
그러면서 문학의 역할을 말하는데, 문학은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배우게 한단다. 간접체험인 탓에 문학에서의 배움은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꿔주진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조금씩 좋아지리라는 믿음은 키울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직접 살아보거나 해볼 수 없는 것들을 문학을 통해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말한다.
상대에 대한 섣부른 위로는 엇나가기 일쑤고 어차피 타인의 삶속으로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타인이란 누구인가’ 고민한다. 죽음을 향해 간다는 걸 알면서도 ‘왜 사는지’를 고민한다. 이런 이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 역시 문학만한 게 없을 것 같단다.
내가 겪거나 저지른 온갖 실패와 실수들을 되새기며 찬찬히 배우고 문학을 통해, 문학과 함께 노력한다면 나도 아주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되리라 믿어도 되겠구나 싶다. 신형철의 말처럼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자 배우기 가장 어렵다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면서 말이다. 나더러 책이 왜 좋으냐 묻는 이에게 들려줄 말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