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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 끌로셰
  • 등록 2018-12-20 16:46:40
  • 수정 2018-12-21 11: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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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Vatican News)


2019년 1월 1일 제52차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메시지를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억압, 소외, 파괴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인간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평화의 정치(politifcs of peace)를 펼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메시지 전문 번역이다.


1.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그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받은 사명의 핵심입니다. 그 평화는 인간 역사에 점철된 비극과 폭력 가운데서도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1].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집’은 각자의 다양성과 역사를 지닌 모든 가정, 공동체, 국가 그리고 대륙을 뜻합니다. 집이란 무엇보다도 구분과 차별이 없는 모든 개인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 ‘공동의 집’이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이며 우리가 보살피고 가꿔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그러니 저는 새해를 시작하며 이렇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2. 바른 정치가 제기하는 도전


평화는 프랑스 시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가 찬미했던 희망과 같습니다[2]. 평화는 폭력이라는 돌무더기 땅에 피어나기 위해 애쓰는 연약한 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권력을 획득하려는 갈망이 학대와 불의로 이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정치는 인류 공동체와 기관을 세우는데 필수적인 수단이지만 정치 생활(political life)이 사회 전체에 대한 섬김의 형태로 인식되지 않을 때 정치는 억압, 소외(marginalization) 그리고 파괴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말씀하십니다. 성 바오로 6세의 말로 표현하자면 “정치를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분야에서 엄격히 규정지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으니, 자기 도시와 국가와 전 인류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부여된 자유 선택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중대한가를 강조하는 것과 일반이다”[3]라는 것입니다.


즉, 정치 직무(political office)와 정치 책무(political responsibility)는 계속해서 국가에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그 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보호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정의로운 미래 환경을 조성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생명과 자유,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공직 생활을 수행한다면 이는 뛰어난 사랑의 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3. 사랑과 인간 덕목: 인권과 평화를 증진하는 정치의 기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 역량에 따라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 공동선을 위한 노력이 사랑으로 활성화되면 단순히 세속적 정치적 활동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이 됩니다. (…) 인간의 지상 활동이 사랑으로 유지되면 인류 가족의 역사가 나아가는 목표인 보편적인 하느님 도성의 건설에 기여하게 됩니다”[4]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문화나 종교와 관계없이, 인류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건강한 정치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계획일 것입니다. 그 덕목이란 정의, 평등, 상호존중, 진정성, 정직 그리고 충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002년 돌아가셨으며 복음을 충실히 증언하신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François-Xavier Nguyen Van Thuan) 추기경이 제안한 ‘정치인의 참행복’(Beatitudes of the Politician)을 기억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기 역할을 높고 깊게 이해하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스스로 신뢰의 표본이 되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일관적인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경청할 줄 아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

두려움 없는 정치인은 행복하여라[5]


모든 선거와 공직 생활의 매순간은 정의와 법에 영감을 불어넣는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바른 정치는 평화를 증진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정치는 기본권을 존중하고 증진시키며, 이러한 기본권은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에 신뢰와 감사의 관계가 만들 수 있는 상호 의무이기도 합니다.


4. 정치적 악습


슬프게도 정치에는 덕목 말고도, 개인적 무능에 의한 것이든 체계와 기관의 결함으로 인한 것이든, ‘악습’도 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악습들은 공직 생활 뿐만 아니라 당국과 그곳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결정과 행동에 대한 신뢰를 전반적으로 깎아내립니다. 이러한 악습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상을 갉아먹고 공직 생활에 불명예를 가져다주며 사회 통합을 위협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부패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공공자원의 유용, 인간 착취, 권리 부정, 공동체 규칙 무시, 부당한 수익, 무력에 의한 권력 정당화 또는 국가적 이유(raison d'état)를 들어 권력 포기를 거부하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외국인혐오, 인종차별, 자연환경에 대한 무관심, 단기적 이득을 위한 자연재원 약탈 및 어쩔 수 없이 피난을 가야했던 이들에 대한 비방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5. 바른 정치는 젊은이들의 참여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


정치 권력의 행사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만 골몰할 때, 미래는 망가지고 젊은이들은 사회 변두리로 밀려나 자신감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 구체적으로 젊은이들의 재능과 이들의 소망을 키워줄 때, 평화는 이들의 모습과 얼굴에서 자라납니다. 이 때 정치는 ‘나는 너를 믿고 너와 함께 우리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는 자신감 넘치는 확신(confident assurance)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치가 각 개인의 재능과 능력 안에서 표현될 때 정치는 평화를 증진합니다. “뻗은 손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어주고 받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치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을 가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보살핌과 도움을 주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지혜를 함께 모을 때 우리 손 역시 대화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6]


모든 사람은 공동의 집(common home)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만의 돌을 가져다 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새로운 관계, 지혜, 문화, 영성의 에너지를 약속한다는 점에 확신을 느낄 때마다, 법과 공정한 관계를 토대로 한 진정한 정치 생활은 쇄신됩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복합적이고, 특히 타인과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에 뿌리를 내린 불신 또는 자기 자신의 안정에 대한 골몰로 점철된 우리 시대에서는 이러한 신뢰를 쌓기 쉽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이는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인류의 공동선과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전하는 메신저이자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는 “평화의 일꾼”(artisans of peace)이 필요합니다.


6. 전쟁과 공포 전략에 ‘아니오’라고 말하라



1차 세계 대전 종식 100년 후, 전투에서 사망한 젊은이들과 찢어진 민족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배운 끔찍한 교훈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그저 힘과 공포의 균형으로만 치부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협한다는 것은 이들을 객체로 낮추어보고 이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위협전략(intimidation)의 확대, 무분별한 무기 보급이 우리 도덕과 진정한 평화를 찾는 일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약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공포는 평화의 장소를 찾는 민족 전체의 탈출을 부추깁니다. 모든 불행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는 정치적 수사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평화는 배경과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 법과 공동선에 대한 존중, 우리가 돌보아야 할 환경과 과거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풍성한 도덕적 전통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분쟁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이들의 생명을 지키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생각합니다. 전 세계 6명 중 한 명의 아이는, 설령 아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거나 무장 단체에 인질로 잡혀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쟁 폭력이나 그 여파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들과 이들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증언은 인류의 미래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7. 거대한 평화 프로젝트


최근 우리는 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채택된 ‘UN 세계 인권 선언’ 7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 바오로 23세의 지적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인간이 그 권리들을 의식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그들 의무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권리들의 소유는 이 권리들을 이행할 의무를 포함하는데, 바로 인간들은 인간적 존엄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인간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7]


실제로 평화는 인간의 상호책임과 상호의존에 기반을 둔 거대한 정치 프로젝트의 결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시금 새롭게 떠올라야 할 요구이기도 합니다. 평화는 마음과 영혼의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내적인 것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며 여기에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측면이 존재합니다.


첫째, 확고부동한 태도, 분노, 조급함을 버리고 자기 자신과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로 표현하자면 “나 자신에게도 약간의 부드러움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약간의 부드러움을 내준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족, 친구, 외국인,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과 만나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과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셋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시민이자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개인적, 공동체적 책임을 재발견하고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위기에 처한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평화의 정치(politifcs of peace)는 언제든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부르신 마니피캇(Magnificat)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0-55)


2018년 12월 8일, 바티칸


[1] Cf. 루카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2] Charles Péguy(샤를 페기), Le Porche du mystère de la deuxième vertu, Paris, 1986

[3]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팔십주년」 (Octogesima adveniens), 1971, 46항

[4]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진리 안의 사랑」 (Caritas in veritate), 2009, 7항

[5] Cf.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 파두아 “시비타스” 컨벤션 연설, 2002

[6] 베네딕토 16세, 배낭(Benin) 당국에 대한 연설, 2011/11/19

[7]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1963, 44항

(1) Cf. Oeuvres complètes de S. François de Sales(Tome 2), 1861, p. 7 : “언제나 가능한 만큼 부드러워 지십시오. 식초 100통 보다는 꿀 한 숟가락에 더 많은 파리가 모여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역자주



[필진정보]
끌로셰 : 언어문제로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글이나 그러한 글들이 전달하려는 문제의식을 발굴하고자 한다. “다른 언어는 다른 사고의 틀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사회 현상이나 문제는 주조에 쓰이는 재료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의식은 같은 분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그 논점과 관점이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해외 기사, 사설들을 통해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정보 속에 담긴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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