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쑤’와 ‘악의 축’의 만남
1994년에 나온 영화 <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을 기억한다. 당대의 명 배우였던 팀 로빈슨과 모건 프리먼이 열연 했던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팀 로빈슨이 쇼생크 교도소 탈옥에 성공하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였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오랜 수감생활 끝에 모범수로서 판정받고 가석방된 두 ‘영감’의 다른 길이었다. 그것은 처음 맞이한 길에 대한 선택이고 결정이고 그에 대한 전혀 다른 펼쳐짐이었다. 하나는 죽음, 다른 하나는 자유.
DPRK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USA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고 있다. 70여 년 전 한반도를 무대로 치열한 아니 처절한 전투를 벌여왔고 이후 지금까지 내내 조선은 미국을 “원쑤”로 부르고, 미국은 조선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부르며 상대방을 향한 증오를 넘어서 서로가 지구에서 사라지기를 염원했던 상대국들이다. 그런 나라의 대표들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한 이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서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길로 갈 것인가?
『깨물지 못한 혀』에서 말하려 했던
한국천주교회의 원죄
영화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1989년 소개된 <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 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은 해리슨 포드와 숀 코너리가 나오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썼던 ‘성배’를 찾기 위해 나치를 상징하는 ‘악인’과 고고학자로 분한 ‘선인’의 대결이다. 결말은 악인이 선택한 ‘황금잔’이 아니라 선인이 선택한 ‘나무잔’으로 끝났지만 문제는 그 잔으로 가기위한 과정에 만난 절벽이었다. 그 절벽은 눈으로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보였지만 확신으로 한 발 내딛을 때 비로소 건너갈 수 있는 다리였다. 우리는 늘 그런 다리와 절벽사이에 있는 것 같다.
필자는 2008년 8월 15일 민족해방절에 『깨물지 못한 혀』(우리신학연구소)를 출간했다. 그 책을 통해 아픈 마음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원죄를 ‘친일’이라고 말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했던 숱한 일에 대해 민족과 역사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요구했다. 모두 알고 있는 대로 한국천주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대림 첫 주일에 발표한 과거사 반성문건 <쇄신과 화해> 2항에서 일제강점기 때 행한 친일행위에 대해 참회나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후 교회는 2009년 발표된 친일인명사전이나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에서도 ‘바담 풍’이었다. 건너갈 다리를 확신하지 못한 채 절벽만 보였던 것은 아닐까?
‘백척간두 진일보’는 무엇일까?
마침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3·1 운동 정신의 완성은 참 평화>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앞에 말한 2000년 <쇄신과 화해>를 교회가 공식적으로 ‘문건’이라고 부른 것에 비해 이번은 ‘담화’라고 부른 것에 주목한다. 주교회의 의장의 담화문을 대하면서 천주교인이자 한국인으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담화문은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며 ‘반성·참회·용서’를 구했다. 주교회의 의장이자 대주교로서 담화문을 발표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했던 선임자들의 행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교계제도로 굳어진 조직에서는 발목 잡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담화문은 마침내 절벽을 건넌 것일까?
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말은 불가의 화두 간두진보(竿頭進步)에서 나오는 말이다. 백척이니 30m쯤 되는 나무 꼭대기에 오르기도 힘들지만 그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화두이다. 그것은 선방 화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요청이며 요구이다. 답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닐 것이다. 머리로 풀려고 하는 이들에게 화두는 미로와 같은 퍼즐이거나 다빈치코드이겠지만 화두는 삶으로서 만나야한다.
사랑은 목숨을 건 비약이다.
일찍이 석가와 예수 같은 성인들이 ‘자비’와 ‘사랑’을 말한 것은 백척간두에서 내딛는 진일보 같은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교회의 선행으로 30m 꼭대기에 올라선 것은 가상한 일이고 존경 받을 일이지만 이웃을 향해, 역사와 민족이라는 속세 안으로 한발 내딛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와 사랑이다. 그러기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을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라고 말한 것이다.
첫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져 있지만 한반도는 처음으로 ‘화해’를 통한 ‘평화’의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장애물과 어려움이 거듭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쇼생크에서 가석방되어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어리둥절한 자의 모습이다. 처음 가는 길은 낯선 길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로 한반도는 들어서고 있다. 100년 후 3․1운동 200주년을 맞는 날 한반도에 살고 있을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 지 궁금하다.
예수의 새 계명, 새로운 길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이 섬기는 자임을 밝힌 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라고 말하는 순간 제자 중 한 명인 유다는 예수가 만들려는 ‘새로운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분을 떠나갔다. 분명 사랑은 새로운 길이다. 그러기에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려운 길이다. 한반도에서 시작되는 평화가 어떤 자리매김으로 퍼져 나갈지는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반성을 통한 마음 가짐이 아름답게 번져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