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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언론인협의회, '세월호 참사 1년, 한국사회 길을 묻는다' 포럼 개최
  • 이상호 편집위원
  • 등록 2015-06-19 09:42:56
  • 수정 2015-06-19 15: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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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리타스 지유석 기자


가톨릭언론인협의회는 18일 ‘세월호 참사 1년, 한국사회 길을 묻는다’라는 주제로 제 15회 가톨릭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서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은 ‘가톨릭의 눈으로 본 세월호 참사’라는 발제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대응은 크게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주교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은 모두 반성해야 하며, 지금보다 더 세월호 참사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책임이 큰 주교들부터 앞장서고, 신자들은 사회교리와 성서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세월호 희생자는 ‘이름 없는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밝혔다.


김문태 서울디지털대 교양학부 교수는 ‘세월호 참사와 <답게> 사는 길’이라는 발제에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릇된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하는 진정한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 ‘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 단원고 박성호 어머니 정혜숙 씨는 지난 1년 여 동안 피해 가족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은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였다면서 4가지 토론 주제를 제시했다.


하나, 국가란 무엇인가?


둘, 잘못된 종북 프레임은 어떻게 넘어야 하나?


셋, 약자와 연대하지 못하고 잘못된 부활신앙을 강요하는 교회의 문제점과 대응 방안은 무엇인가?


넷, 종교, 사회, 국가 공동체의 실천적 적용 덕목은 무엇일까?


최호선 영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토론에서 세월호 피해 가족들에는 두 가지의 치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나는 외적 치유로, 이는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내적 치료로, 지지와 비난이라는 여론의 극과 극에 노출됐던 피해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천도교 연구소의 임형진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는 포럼에서 제기된 문제가 사회변혁으로 이어지려면 어떤 행동이 필요한가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정부에서 하는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에는 어떠한 대응을 하여야 하는가, 언제까지 광화문 바닥에서 유가족들을 있게 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에 구체적 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우 jtbc 부국장은 세월호 관련 보도를 되돌아 본 후, 언론은 보도의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기계적 균형에 집착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보도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질적 균형성의 확보가 숙제라고 밝혔다.


이후 자유토론에서 아직 수습되지 않은 단원고 조은화 양의 어머니 이금희 씨는 세월호 속에 9명이 있다며, 이들 미수습자 가족들의 아픔을 과연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이 씨는 개도 죽으면 묻어준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개만도 못하냐면서, 세월호를 빨리 인양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씨가 세월호 속에 당신 자식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부터 할 것입니까, 라며 울부짖자 토론장은 얼마동안 숙연해지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포럼의 주요 내용이다.



발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편집인)

: 가톨릭 정신으로 세월호 참사를 진단한다


독일의 칼 레만 추기경은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 바 있다. 해방신학을 비판하려는 사람은 해방신학을 비판하기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얼마나 해왔는지 먼저 반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월호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대응을 냉정히 살피려는 사람은 그동안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노력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세월호 희생자를 얼마나 위로하고 편들었는지 먼저 자신을 냉철히 살펴야 한다.


오늘 나의 의견에는 몇 가지 전제와 한계가 있다.


첫째,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 입장에서 말한다. 제3자적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둘째,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 입장에서 보려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신학에도 중립은 없다. 가해자와 희생자를 똑같이 대하는 신학은 없다. 중립을 균형감각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중립을 위장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셋째, 비판뿐 아니라 반성하는 마음도 잊지 않는다.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는 제대로 대처했는가 나는 물으려 한다. 주교뿐 아니라 가톨릭 언론, 평신도들의 처신도 살펴본다.


세월호는 시대의 징표 중 하나라고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종합해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건 발생과 구조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무능과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언론, 지식인, 종교의 맨얼굴이 국민들에게 노출되었다. 국민의 무관심과 이기주의도 곳곳에서 발각되었다. 개인과 사회구조의 여러 모순들이 겹치고 얽힌 채 드러났다. 한국사회와 국민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모두 당황하는 표정이다.


그리스도교 복음은 세월호 참사를 보는 우리에게 어떤 빛을 주는가. 먼저, 진실을 정직하게 대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다. 아프고 힘들더라도 한국 사회와 우리 개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피라는 말이다. 진실을 정직하게 보는 자세가 없으면 우리는 회개도 불가능하고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기 어렵다.


세월호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내부 갈등이 자주 드러났다. 주교들의 엇갈리는 발언과 처신, 세월호에 무관심한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도 적지 않았다.


주교들의 현실 인식과 처신에 만족하기 어렵다. 가톨릭 언론의 자기 검열과 한계는 잘 드러났다. 정치권력 앞에서 눈치 보는 종교권력의 어정쩡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존경할 만한 종교인이 누구인지, 그럴 필요가 없는 종교인이 누구인지 잘 드러났다. 진실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거짓의 편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일, 작년 8·15 대전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미사를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위령미사로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황이 팽목항을 방문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올해 1월 교황은 필리핀 방문에서 몇 년 전 일어난 태풍 피해 지역을 방문했던 일이 떠오른다.


만일,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과 책임을 한국주교회의에 주었다면 과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진실이 명백히 밝혀졌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는데 나는 한 표를 걸겠다. 만일, 로메로 대주교나 베르골리오 추기경(지금 교황)이 서울대교구장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보다는 무언가 크게 달라졌을 거다. 만일,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난다면, 한국천주교회의 대응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까? 아마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싶다.


주교들은 정치적 판단보다 신학적 판단을 먼저 해야 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주교들은 어떻게 하면 정치권력과 갈등을 피할까 연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불의한 권력과 싸울까 고뇌하길 바란다.


주교들은 어떻게 하면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낼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까 생각하길 바란다. 주교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들에게 도움을 받을까 연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울까 연구하길 바란다. 로메로 대주교 말대로, 주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주교는 교회재산 관리보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더 신경 써야 한다. 사제들과 평신도도 마찬가지다. 이기적 신앙은 신앙도 아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28일 미사 강론에서 말했다. 우리 교회 안에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 같다.


가톨릭 언론, 가톨릭 언론인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했는가.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밝히려고 애써 왔는가. 각 교구 주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신자들에게 얼마나 자주, 정확하게 알려 주었는가. 사제들은 강론과 교육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확하게 진실 되게 말하였는가. 한국에 가톨릭 언론이 있기는 있는가. 가톨릭 언론인 중에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 마땅한 사람은 혹시 없는가.


세월호 희생자를 교회가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말하고 싶다.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는 문제다.


‘이름 없는 순교자’는 독일 신학자 칼 러너에 의해 제안됐다.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는 ‘해방자 예수’라는 책에서 이 개념을 더 자세히 다루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방한 때 ‘이름 없는 순교자’라는 표현을 4번이나 사용했다.


소브리노는 하느님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능동적 순교자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하느님나라라는 구체적 메시지를 잘 알지도 못하고, 하느님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뚜렷한 의지도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왜 죽는지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을 수동적 순교자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소브리노가 분류한 ‘수동적 순교자’를 ‘이름 없는 순교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름 없는 순교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세력들의 정체를 세상에 폭로하는 역할을 주로 한 분들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세월호 희생자들뿐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제주 4·3 사건 희생자. 한국전쟁 때 양민학살 희생자들도 이에 포함된다.


세월호 희생자들은 진실을 거부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사람과 세력이 누구인지 밝혀주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밝혀주었다. 그렇게 해서 세월호 희생자들은 하느님나라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은 이름 없는 순교자, 아니 순교자라고 불러 마땅하다.


교회는 불의한 권력에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비판을 예수는 피하지 않았다. 예수는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주교단은 세월호에 대한 입장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 주교들은 왜 단식투쟁을 하지 못하는가. 주교들은 로메로 대주교처럼 왜 저항하지 않는가. 주교들은 왜 십자가를 두려워하는가. 주교들은 예수를 따르기 싫은가.


만일 어떤 주교가 부자나 권력자와의 친분을 자랑하거나, 그 친분을 이용해 교회에 특혜를 얻거나 기대하다면, 그 주교를 주님의 참 제자라고 볼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 주교를 주님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주교의 빨간 모자는 순교의 피를 상징한다. 주교는 교회 안의 누구보다도 먼저 순교하려고 애써야 한다. 초대교회 주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가톨릭 언론은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 악의 앞잡이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톨릭 언론의 진짜 소유주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가톨릭 언론의 사명이다.


평신도 교육에 문제가 있다. 사회교리와 성서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엉터리 신자들이 성당에 가득한 것이다. 평신도 단체는 제대로 하고 있나. 세월호 참사가 성당 신축이나 성지개발보다 덜 중요한가.


복음선포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의 반발을 일으킨다. 어떻게 보면 복음선포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복음선포에 반대하는 세력과 갈등하고 다투는 일은 쉽지 않다. 거기에서 여러 태도가 나올 수 있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복음선포의 일부 측면을 포기하고 교회 조직을 유지하려는 사람이 있다. 복음선포에 따르는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누가 옳을까. 예수는 어떻게 했는가. 로메로 대주교는 어떻게 했는가.



김문태(서울디지털대 교양학부 교수)

: 세월호 참사와 ‘답게’ 사는 길


부정하고 불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면 언젠가 그와 유사한 일이 재발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릇된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를 경시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임을 지는 사회와 국가는 오랜 세월 동안 굳건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되새겨야 하는 까닭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의 위상에 대한 성찰과 각성이 있을 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인해 야기된 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답게’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병폐를 개선하고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는 한편,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밝고 건강한 사회로의 변화를 도모해야 할 시점이다.



토론


정혜숙(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어머니)

: 세월호 참사 1년, 이제 멈춰야 할 시간


국가가 반드시 제 역할을 했더라면 전원 구조될 수 있었다. 한 때 모든 책임은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고 국민 앞에 눈물 흘리며 부정부패와 적폐를 뿌리 뽑겠다던 대통령은 헌법도 위반하는 시행령으로 진실을 막아섰다.


유령 같은 면피용 재판을 진행하고 있고, 국가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 배보상법을 진행하는 비상식의 실태를 낳고 있다. 이는 구조하지 않고 산 채로 수장시킨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것이고, 피해자와 피해 가족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근거다.


구조될 수 있었던 자식을 허망하게 잃고 피울음으로 자식의 죽음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울부짖음이 국가와 국민을 괴롭히고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회악이란 말인가? 왜 그들은 어디를 가나 치안의 대상이고 종북자로 낙인찍어도 되는 대상이 되는가?


참사 1년 동안 국가의 폭력을 참아내면서 세월호 가족들이 가장 많은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였다. 국가란 존재하는가? 왜 국가는 구조하지 않았는가? 왜 진실을 감추려하는가? 왜 최소한의 자연법마저도 침해하는가?


구조하지 않는 사람들과 작동하지 않는 국가를 보면서 가족들은 악마를 보았다고 말했다. 믿었던 신도 침묵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대체 신은 있기나 한 것인가?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는가? 신은 왜 죄 없는 아이들을 살려내지 않았는가? 신은 무엇을 했는가?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산 채로 수장되는 전무후무한 죽음 앞에서도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했다. 침묵함으로써 무언의 동조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침묵만으로도 자신의 보호받을 권리를 잠재우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잔혹한 비난을 퍼부었다. 생명을 빼앗긴 자의 비명 앞에서도 가족들의 절규 앞에서도 그들은 쉼 없이 잔인했다.


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 사람들의 경계는 없었다. 신앙과 현실은 다른 세계인양 그들의 이중성은 세월호 참사 앞에 낱낱이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1년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국가란 무소불위의 탐욕을 휘두르며 언론과 검·경을 장악한 채 죄인이어도 죄인이 아닌 천국을 선사 하는 것만 같다. 힘없는 자들에게 국가란 아무리 ‘답게’ 살고자 노력해도 기쁘지 않고 힘겹고 억울하고 모욕적이게 다가올 수도 있다.


지금도 곳곳에서 기도와 미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연대는 미약했다. 방한 4박 5일 모범을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종처럼 아픈 이들 곁으로 자주 행하는 주교가 없다. 살을 깎고 피를 봉헌하며 단식하는 사제들의 곁을 지켜주거나 연대로 이어지는 대안을 준비하는 주교도 없는 듯하다.


주교 눈치만 보는 사제들이 있었다. 평신도들도 주교들과 사제들과 다르지 않다. 곳곳에 연대하는 이들만 연대한다. 신앙의 재교육 없는 평신도들의 궁핍함은 지극히 세속과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속아 더 이상 권리를 잠재우는 자가 되지 말자. 다시 세월호의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막아 세워야 하지 않은가.


기도만 있고 연대는 없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내 탓’이나 ‘답게’ 처럼 집단이나 구조적 악을 개인윤리로 돌리면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이 넘치면 파멸이고 죽음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치면 그것이 그리스도다.


예수는 세월호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민중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잘 만들어가라고 오신 것이다.


최호선(영남대 심리학과 교수)

: 슬픔은 별이 되고, 강아지 똥이 되고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 유가족들은 과도한 관심과 지나친 경멸의 대상이 되어 치유 받기보다는 거듭 상처받는 존재로 전락했다. 또 보상금을 앞세운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국민들에게 보상금에 관한 오해를 받기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일 년이 지난 현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한 사회 건설 등 외적인 목표와 더불어 유가족들의 심리적 치유와 일상으로 복귀를 돕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치료와 치유의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가정의 불행을 넘어 우리 시대의 불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임형진(경희대 정치학과 교수, 천도교 연구소)

: 세월호 참사 1년, 한국사회의 길을 묻는다


안타깝게도 세월호 참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특별법은 통과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부는 시행령이라는 하위법 속에 특별법을 가두어 두려고 한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정부는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또 숨겨야만 하는 것일까? 이 정도가 대한민국의 수준이란 말인가.


오늘 세월호 참변을 기억해야 하는 순간 가톨릭포럼에서 우리들에게 한국 사회의 길을 묻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여기서 머물지 말고 진정한 사회 변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면 어떤 행동이 필요한가가 제시되어야 한다.


작금의 이 정부에서 하는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에는 어떠한 대응을 하여야 하는가, 언제까지 광화문 바닥에서 저들 유가족들을 있게 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에 구체적인 답을 해야 한다.


동학혁명 때 농민군은 그 원인이 고부 군수 조병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종에게 있다고 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책임은 최고 통치권자에 있는 것이다.


김상우(jtbc 부국장)

: 세월호 보도에서 느낀 점


첫째, 기자는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장에 있어야 한다.


둘째, 필요한 부분만 또는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보도하는 주요 언론에 의한 정보통제는 이제 더 이상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뉴스 가치를 평가하는 데 공감이라는 항목이 새로 추가되었다. 기사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독자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공정성의 문제다. 현재와 같은 기계적 균형성에의 집착은 사회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보도의 부족을 가져온다. 질적 균형성의 확보가 앞으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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